항목 ID | GC408008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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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秦喜葵 |
영어공식명칭 | Jin Huigyu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친일 경제인.
[활동 사항]
진희규(秦喜葵)[1878~1959]는 한 일 병합 이후인 1911년부터 1920년까지 경상북도 참사(參事)로 복무하였다. 그 사이 1915년 10월 일본 적십자사 특별 사원으로 활동하였다. 1915년 10월 대구부에 자신의 토지를 도로 부지로 기부하여 목배 1개를 받았다. 1918년 대구 은행에 자본을 투자하고 감사역이 되었다. 1919년 계림 농림 주식회사(鷄林農林株式會社) 이사, 1920년 주식회사 대동사(大東社) 이사, 1920년 경일 은행(慶一銀行) 이사, 1920년 대구 주조 주식회사(大邱酒造株式會社), 1928년 경상 합동 은행(慶尙合同銀行), 1935년 대구 상공 은행(大邱商工銀行) 등의 회사에 자본을 투자하고 경영에 참여하였다. 1924년에는 수성 공립 보통학교 학부형 장학회 회장이 되었다. 또한 1924년 달성군수성 수리 조합 조합장, 1927년 달성 동부 금융 조합 조합장 등을 역임하였다. 진희규는 경상북도 고령(高靈)·달성(達城)·경산(慶山)·칠곡(漆谷) 등지에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진희규는 1924년 4월과 1927년 4월 경상북도 관선 도 평의회 의원이 되었다. 이때 그는 ‘당선사례’를 통해 "금반(今般) 경상북도 평의원에 임명되었음은 도민(道民) 첨위(僉位)의 애원해 온 바 금후 일층 도치(道治)에 전력코자 자(玆)에 감히 감사의 뜻을 표하옵니다."라고 하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1932년 조선 유교회 명리원(明理院) 의정(議正)이 되었다.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조선 총독의 자문 기관인 중추원 참의로 활동하면서 연수당 600원을 받았다. 8·15 광복 후 1949년 박창수 참의와 함께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반민 특위]에 체포되었다. 진희규는 1959년 11월 25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진희규는 1938년 8월 대구 공립 여자 고등 보통학교에 설립비 1000원을 기부하여 표창을 받았다. 1928년 11월 칙령 188호에 의거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37년 7월 시정 25년 기념 박물관 건설비로 1000원을 기부하여 조선 총독부로부터 표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