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8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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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相泰 |
영어공식명칭 | Yoon Sangtae |
이칭/별칭 | 윤주경,성민,성천,향산,윤상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자는 성민(聖玟) 또는 성천(聖天), 호는 향산(香山). 아명은 주경(周經)이다. 윤상우(尹相佑)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윤필은(尹弼殷)이며, 작은 아버지는 윤상은(尹相殷)이다.
[활동 사항]
윤상태(尹相泰)[1882~1942]는 1882년 9월 30일 경상북도 달성군 월배면 상인동에서 태어났다. 1905년 1월 거제(巨濟) 군수에 배명되었다가 그해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군수를 사직하였다. 고령군 성산면 우곡동에서 지내다가 달성군 상인동으로 옮겨 살았다. 1913년 달성군 수성면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열린 비밀 결사 재건 달성 친목회[조선 국권 회복단 중앙 총회] 결성에 참여하고, 그 이후 활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자신의 집에서 서상일을 비롯한 여러 동지들과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1920년 재판을 받았으나 내란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하여 면소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1929년에는 지역의 유지이자 1915년 ‘대구 권총 사건’의 관계자인 정운기가 해외여행을 다녀온 뒤 서로 합심해 해외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했을 것이라는 일제 경찰의 의심 때문에 가택을 압수 수색 당하고 경찰에 체포되는 고초를 겪었다.
1911년에 경상북도 고령에 사립 일신 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여 소정 과목 이외에 군사 교육과 국사 등을 교육시키며 독립 사상을 고취하였고, 1921년 무렵 달성군 월배면에 사립 덕산 학교(德山學校)를 설립하였다. 1932년 대구의 사립 교남 학교의 재정난을 돕기 위하여 교남 학교 후원회를 결성하여 기금을 조성하였다. 1930년 영남 체육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대구부가 추진하던 대구 종합 운동장이 조선인 주거 지역인 비산동에 건립될 수 있도록 활동하였다. 1910년대 전반기 그의 자산은 동산·부동산을 합해 10만 원 정도였다. 경상북도 왜관에 미곡을 중심으로 한 향산 상회(香山商會)를 경영하였다. 대구 은행에 자본을 투자하여 주식 1,000주를 소유한 대주주였으며, 1920년대 후반 대구 은행과 경남 은행이 합병한 경상 합동 은행의 대주주였다. 1936년 조선인이 운영하는 조양 무진 주식회사(朝陽無盡株式會社)에 자본을 투자하고 이사로 활동하였다. 1937년 자본금 50만 원 규모의 경북 상공 주식회사의 대표 이사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