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8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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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忠植 |
영어공식명칭 | Chae Chungsik |
이칭/별칭 | 석우(石友)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인천(仁川). 호(號) 석우(石友). 아버지는 채성원(蔡星源), 어머니는 서남주(徐南珠)이다.
[활동 사항]
채충식(蔡忠植)[1892~1980]은 1892년 음력 11월 15일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에서 태어났다. 1923년에 왜관 청년회가 설치한 여자 야학의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즈음 그는 『조선 일보』왜관 지국장으로 언론 활동을 하였다. 1925년 낙동강이 범람하는 홍수가 발생하자, 칠곡군 12개의 사회단체로 칠곡 기근 구제회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1926년 칠곡, 선산, 성주 등 3개 군의 언론 기관을 중심으로 한 삼군 기우단(三郡記友團) 결성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왜관 청년회가 운영하던 동창 학원(同昌學院)[1922년 4월 개원]의 교사가 되었다. 1926년 순종 인산을 즈음해 백립(白笠)[흰 갓] 1,800개를 구해 대중들에게 보급하여 순종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1927년 1월 여운형, 최정익 등과 농촌 개발과 문맹 퇴치란 기치를 내걸고 농민 생활 향상을 위한 생산 조합과 소비 조합 조직 형태인 조선 농인사(朝鮮農人社) 결성에 참여하고 이사가 되었다. 같은 해 신간회 칠곡 지회 설립을 위한 준비 위원으로 참여하고 동 지회 의장 겸 서무부 총무 간사가 되었다. 1928년 1월 조선 청년 총동맹 경상북도 연맹 위원회를 결성하기 위해 치러졌던 경상북도 기자 대회에 참여하고 임시 집행부 의장, 집행 위원장 겸 서무부로 활동하였다. 경상북도 기자 대회 직후 열린 경상북도 청년 운동자 간담회에 참가하고, 이 간담회를 통해 결성된 조선 청년 총동맹 경상북도 연맹 위원회에 참여하였다. 그 뒤 대구로 활동 무대를 옮겨 『중외 일보』 대구 지국 기자로 활동하였다.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대되어 갈 때, 1930년 3월 대구에서 대구 청년 동맹 위원장 박명줄(朴明茁) 등과 함께 일제의 조선 지배의 부당성을 알리고 대중들의 민족 운동에의 동참을 호소하는 활동을 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강력한 수사에도 그는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그즈음 신간회 대구 지회에 입회하여 서무부장 겸 서기장으로 활동하였고, 1931년 5월에는 신간회 본부의 중앙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대 지역의 민족 혁명적 언론인들과 함께 보도 협조망을 조직하여 동지 간의 연락과 정세 동향 및 운동 방향을 모색하였다. 1932년 왜관 출신의 대구 고등 보통 학교 학생들과 함께 청년 동지회를 결성하였다. 특히 청년 동지회 청년들은 이후 왜관 지역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농민 운동 조직을 결성하여 대중 운동을 펼쳤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4년 해방과 건국을 준비하기 위한 비밀 결사로서 조선 건국 동맹이 결성되자, 다음해 1월 대구 지역의 김관제, 이선장, 정운해 등과 건국 동맹 경상북도 조직을 결성하였다. 1945년 8월 일제 패장 직전 건국 동맹 경상북도 지역 관계자들과 함께 검거되었다가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대구의 좌우익이 연합하여 만든 건국 준비 경북 치안 유지회에서 건국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경상북도 인민 위원회 부위원장 겸 재정부 위원을 맡았다. 1945년 11월 전국 인민 대표자 대회에 대구 대표로 참석하여 확대 집행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대구 복양당 한약방에서 민족 혁명당 경상북도 총지부 결성 준비 위원회가 개최되었고, 총무 부장으로 선임되었다. 1956년 동지였던 김관제의 유적비를 건립하였고, 그 뒤 조선 은행 폭파 사건을 일으켰던장진홍 의사 기업 사업회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1980년 8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묘소]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묘소가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