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8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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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德鎭 |
영어공식명칭 | Jeong Deokjin |
이칭/별칭 | 정입진,정팔진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정덕진(丁德鎭)[1897~1977]은 1897년 1월 9일 경상북도 달성군 달성면 성당동에서 태어났다. 정덕진의 또 다른 이름은 정입진(丁入鎭) , 정팔진(丁八鎭)이다. 1920년 8월부터 대한민국 임시 정부 특파원 이현수(李賢壽)와 함께 포고문, 유고문, 군자금 모금을 위한 경고문, 긴급 경고문, 독립 공채 모집에 관한 서류, 『자유 신보(自由新報)』, 왜인 물품 불매 고지서, 납세 거절 협박문 등을 작성하거나 인쇄하였다. 이런 인쇄된 문건을 경상북도 내 한국인 군수와 면장, 기타 관공서 관리, 부호 등에게 발송하였다. 아울러 심야에 대구 시내의 가로에 살포하며 항일 민족의식의 고취와 군자금 모집에 힘썼다.
또한 정덕진은 이현수, 독립 공채 위원 서장환(徐章煥)·곽종해(郭鍾海) 등과 함께 1921년 개최되는 워싱턴 군축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여 일제의 식민 통치의 부당성을 각국에 알리고자 하였다. 대구·평양·전주 등지에 거주하는 외국인 선교사와 부산에 거주하는 외국인 의사 아벤에게 독립 청원서를 우송하는 한편, 워싱턴 군축 회의에 즈음하여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긴 『자유지(自由誌)』를 인쇄하여 신문사와 국내 각지에 배포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게 가택 수색을 당하여 10여 종의 독립 운동 관련 문건 등을 압수당하여 체포되었다. 1919년 제령 제7호와 출판법 위반으로 대구 지방 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26세가 되던 1923년 1월 29일에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출감되었다.
[묘소]
정덕진의 묘소는 국립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제4묘역 320호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정덕진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