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9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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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錫鳳 |
영어공식명칭 | Moon Seokbong |
이칭/별칭 | 이필,의산,문봉각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개항기 달성군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남평(南平). 본명은 문봉각(文鳳珏)이다. 충선공 문익점(文益漸)의 20세손이며, 11대조 문세근(文世根)이 처음 달성으로 옮겨와 살았다. 9대조 문영남(文榮南)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활동, 선략 장군 훈련 봉사(宣略將軍訓練奉事)의 직을 받았다. 아버지는 문하규(文夏奎)이고, 어머니는 경주 이씨(慶州李氏)다.
[활동 사항]
문석봉(文錫鳳)[1851~1896]은 1882년 전라도 지역의 세곡을 조운선으로 서울까지 운반하는 조운리(漕運吏)가 되었다. 1893년 5월 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경복궁 5위장에 제수되었다. 그 해 12월에 진잠 현감에 제수되었다가 다음해 3월 모친상을 당해 집으로 돌아왔다. 1894년 11월 양호 소모사(兩湖召募使)로 공주부에서 근무하면서, 인근의 동학 농민군 진압에 큰 공을 세웠다. 1895년 2월 공주부의 인사에 따라 공주부의 신영 영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895년 9월 18일 유성에서 명성 황후의 살해 소식을 듣고 '천고에 없는 강상의 대변'이라고 통분하며, '국수 보복'의 기치를 내걸고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은 공주부 관아를 목표로 창의하였다. 회덕현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의병 부대에 필요한 무기를 확보한 뒤 진잠에 입성하고, 같은 해 10월 28일 공암을 지나 공주부로 나아갔다. 의병 부대는 공주 와야동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관군에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경상도 고령, 초계 등지에서 재봉기를 준비하고 고령 현감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같은해 11월 24일 고령 현감의 고변으로 체포되어 대구부에 구금되었다. 1896년 봄에 대구 감옥을 탈출하여 과천으로 갔다가 서울을 거쳐 원주 등지에서 재차 거병하려 했으나 병에 걸려 8월 무렵 고향인 현풍으로 귀환하였다. 그 해 11월 병고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의산 수록(義山隨錄)』 2책을 남겼다. 이를 저본으로 1934년 후손들이 간행한 『의산 유고(義山遺稿)』 2권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93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