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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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在憲 |
영어공식명칭 | Park Jaeheon |
이칭/별칭 | 박재곤,박영재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남정원 |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 화원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박재헌(朴在憲)[1900~1986]은 기독교 계열의 계성 학교에 재학 중 1919년 3·1 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는 계성 학교 학생으로서 2차에 걸친 대구 지역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대구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박재헌은 1920년 평양 숭실 학교 재학 중 국내 사정을 외국 선교사에 전달하여 국외에 독립 의지를 선전하고 미국 의원단 입국 때에는 선교사를 통해 독립을 호소하였다. 그 뒤 그는 임시 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2년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 정부 특파원으로 입국하여 경상북도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에 열중하면서 납세 거부와 일본 상점 물품 판매 반대 삐라를 살포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또한 의열단에 가담하여 임시 정부의 공채(公債)를 모집하던 중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24년에는 상하이 임시 정부의 지시로 동향인 이정호(李貞浩) 등 여러 사람을 중국에 도항시켜 의용군을 돕도록 하였다. 1925년 경상남도 밀양의 집성 학교(集成學校)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박재헌은 고인덕(高仁德)과 함께 밀양 교회를 중심으로 농촌 사업을 가장한 독립운동을 도모하였지만 일제 당국에 발각되어 다시 투옥되었다. 이때 박재헌은 형무소를 탈출하였고 고인덕은 붙잡혀 옥사하였다. 박재헌은 1926년 재대구 미국 선교회(在大邱美國宣敎會)의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미국 선교사에게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41년 12월 18일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다시 투옥되었다가 1942년 6월 병보석으로 일시 출감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