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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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点學 |
영어공식명칭 | Kim Jeomhak |
이칭/별칭 | 김선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간경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점학(金点學)[1906~?]은 1906년 10월 6일 경상북도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간경리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조선 청년 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7년 민족 운동의 노선이 민족 협동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자 귀국하였다. 대구 고등 보통 학교 학생들의 비밀 결사인 사회 과학 연구회가 사상 강좌를 개최할 때, 장적우, 시바타 겐스케[柴田健介] 등과 함께 강사로 초빙되어 학생을 지도하였다. 1927년 7월 24일 대구 청년회, 대구 청년 동맹, 아구 청년 동맹, 무산 청년 동맹 등 4개 단체가 합동하여 결성된 대구 청년 동맹의 집행 위원 겸 교양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1927년 9월 3일에 신간회 대구 지회가 설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8년 1월 경상북도 기자 대회 직후 이루어진 경상북도 청년 연맹 결성 대회에서 김리룡(金利龍)·박창호(朴昌鎬)·신철휴(申喆休)·황윤경(黃潤慶) 등과 함께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7월경 일제 관헌에 체포되어 대구 지방 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0년 9월 수감 중 조선 은행 대구 지점 폭파 사건을 일으켰던 장진홍의 옥중 순국에 항의하는 시위에 동참하였다가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27일 밤 대구에서 조선 공산당[장안파] 대구시 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그 뒤 대구 공산주의자 클럽을 결성하였다. 1945년 10월 말에 대구 달성 연합 농민 조합 협의회 결성에 참여하고, 서영로·채충식(蔡忠植)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상훈과 추모]
2008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