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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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大振 |
영어공식명칭 | Kim Daejin |
이칭/별칭 | 이원,사우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조선 후기 임진왜란 때 의병 운동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달성군 출신의 선비이자 문인.
[개설]
1624년 김경조(金慶祖)[1583~1645]가 이민구(李敏求)에게 선물한 「촉석루 연회도(矗石樓宴會圖)」[세전 서화첩, 2012. 5. 24, 민속원]에 김대진(金大振)[1571~1644]도 그려져 있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에 부임한 이민구가 가을 순시를 하는 중에 진주 촉석루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이었던 김대진도 참석하였다.
[가계]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이원(而遠), 호는 사우당(四友堂). 김굉필(金宏弼)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낸 김대(金垈)이며, 할아버지는 증(贈) 호조 참판(戶曹參判) 김수열(金壽悅)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을 지낸 김응복(金應福), 어머니는 윤언호(尹彦豪)의 딸 공인(恭人) 파평 윤씨(坡平尹氏)와 참봉(參奉)을 지낸 한녕(韓寧)의 딸 공인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다. 부인은 강근(姜近)의 딸 숙인(淑人) 진양 강씨(晉陽康氏)다.
[활동 사항]
김대진은 성주의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인동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 등 두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덕행과 문장을 세상에 떨쳤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1552∼1617]와 함께 의병 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왜적 방어와 토멸에 공을 세웠다. 김대진은 39세인 1609년[광해군 1] 기유(己酉) 증광시(增廣試) 생원시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1609년에 성균 생원(成均生員)이 되었다. 학행천으로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 이어 종묘(宗廟) 봉사(奉事), 돈령부(敦寧府) 직장(直長)을 거쳐 김천도(金泉道) 찰방(察訪)이 되었다. 1624년에는 자여도 찰방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이첨(李爾瞻) 일파가 권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도동 서원(道東書院) 근처 관수정(觀水亭)에서 경서(經書), 사학(史學)을 강론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상훈과 추모]
경상 감사 이민구와 그 지역 사림이 1624년[인조 2] 김대진의 업적을 기리고자 관수정을 건립하였다. 1721년[경종 1] 화재로 불에 타버렸는데 1866년[고종 3] 김대진의 후손 김규한이 중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