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1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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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玄風邑 大一里 - 玄風郭氏 集姓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1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재영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1리에 있는 현풍곽씨 동성 마을.
[개설]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1리 소례마을은 현풍곽씨(玄風郭氏) 집성촌이다. 이 마을의 곽씨들을 비롯하여 인근 영남 지역의 현풍곽씨 약 1,200가구는 자신들을 현풍곽씨 중에서도 특별히 ‘소례 곽씨’라고 부른다. 이는 영남 지역 곽씨들의 모촌이 소례일 뿐만 아니라 소례마을이 지닌 상징성 때문이다.
불천지위(不遷之位) 네 명을 모신 현풍곽씨는 영남에서는 물론 전국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명문이다. 청백리(淸白吏) 곽안방(郭安邦)과 의병장 홍의 장군 곽재우(郭再祐), 임진왜란 충혼 곽준(郭䞭), 연일당(燕日堂) 곽지운(郭之雲), 만심재(晩尋齋) 곽규(郭赳), 탁청헌(濯淸軒) 곽황(郭趪), 정암공(定庵公) 곽월(郭越)을 비롯한 수많은 문인과 달인을 배출한 마을이며 십이 정려의 빛나는 전통을 간직한 마을이다.
[형성 및 변천]
소례마을 입향조는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원종공신(原從功臣)인 곽안방(郭安邦)이다. 소례마을은 곽안방이 1467년 입향한 이후 546년의 역사를 청백과 충절과 효열로 명성을 일으켰다. 그만큼 많은 청백리와 충신·효자·열녀를 배출하였다. 이 마을에는 지금도 100가구의 현풍곽씨들이 문중을 꾸려 살고 있다.
[현황]
소례마을은 마을 어귀부터 일반 마을과 다른 경관을 보여 준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수령 수백 년이 된 은행나무 아래 현풍곽씨 문훈비(門訓碑)가 눈에 띈다. 문훈비에 있는 충효세업 청백가성(忠孝世業 淸白家聲)[충효를 대대로 가업으로 삼고 청렴결백을 가문의 명성으로 삼으라]이라는 여덟 글자는 소례마을 곽씨들의 정신을 드러낸 것이다. 문훈비를 마을 앞에 세워 선조의 유훈을 잠시라도 잊지 않고 실천하려는 의지를 소례 곽씨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소례마을에는 소례 곽씨들의 가장 큰집인 입향조의 종가가 있다. 종가는 다섯 채의 와가로 채워져 있다. 종가 본채를 중심으로 뒤편 우측에 가묘가 있고, 가묘 왼편에 신축한 재사가 있다. 재사 아래에 280년 된 보본당이 있다. 종가 앞에는 별채 형식의 구거당이 있다. 소례마을 서쪽 언덕에는 1994년 9월 30일 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32호로 지정된 이양 서원(尼陽書院)이 있다. 청백리 곽안방을 제향하기 위하여 세운 청백사를 유림에서 서원으로 승격하여 곽안방을 주향으로 하고 곽지운, 곽규, 곽황 등을 배향하고 있다.
현풍곽씨는 조선 시대 36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영남 사림 중에 한 집안에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벼슬길에 오른 경우는 매우 드물다. 곽안방은 곽승양(郭承陽), 곽승화(郭承華), 곽승문(郭承文)의 세 아들을 두었으며, 증손 대에 와서 곽지원, 곽지형, 곽지정(郭之貞), 곽지인(郭之仁), 곽지의, 곽지운(郭之雲), 곽지림(郭之霖), 곽지번(郭之蕃), 곽지견(郭之堅) 등이 활발한 활동을 벌여 나가면서 가세가 번성하게 된다. 현풍곽씨가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친 것은 조선 중기 인종(仁宗), 명종(明宗), 선조(宣祖), 광해군(光海君) 치세에 와서이다.
그런가 하면 소례마을 곽씨들은 조선 제일의 충효열 가문이라 일컬어진다. 그 상징이 십이 정려를 모신 십이정려각이다. 십이정려각은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소개된 바 있는데, 본래 도로가에 있던 것을 50미터 안쪽의 언덕에 이건 복원하였다. 십이정려각에서 1598년(선조31)부터 영조(英祖) 재위 기간까지 포상된 현풍곽씨 집안 열두 명의 의인을 기리고 있다. 그 외에도 입향조 곽안방의 재청인 추보당(追報堂)과 곽지운의 추모 재실인 경모당(敬慕堂), 면우 곽종석 숭모비 등을 포함한 곽씨 현조(顯祖)들의 비군 등이 마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