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12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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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玄風敎會 |
영어공식명칭 | Hyeonpung Gyohoe|Hyeonpung Church |
이칭/별칭 | 하동 교회,현풍 장로교회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현풍중앙로10길 18[하리 244] |
시대 | 근대/개항기,현대/현대 |
집필자 | 엄진성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하리에 있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교단 소속 교회.
[개설]
1905년 하동 교회를 모체로 하여 설립된 달성군 최초의 개신교 교회이다.
[설립 목적]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개신교를 전도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전파되어 설립된 교회는 1904년 현풍읍 하동 교회였다. 1904년 선교사 부해리(傅海利)[Henry Moro Bruen]의 지도로 조기문, 이양우는 그들의 주거지였던 구지면 고봉리에 기도실을 설치하였다. 이를 현풍교회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의 설립에 대해 박덕일의 『경북 교회사』,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의 상권에서도 1905년으로 되어 있다. 공식 기록에서는 1905년에 현풍읍 하동 교회가 부해리에 의해 세워졌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영우는 영수, 조기문은 집사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1912년 달성군 현풍읍 상리에 간이 기도실을 세워 예배를 드리다가 1918년 현풍읍 하리에서 목조 예배당을 신축하였으며, 이영우가 초대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현풍교회 창립자 중 한 사람인 이영우의 아들 이상철이 현풍, 유가, 고령, 구지 일원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자 현풍읍 교회의 기숙사에 숨어 들어와 본격적인 독립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상철은 1918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실습을 하던 중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가담하였던 것이다.
3·1 운동 이후 현풍교회는 1919년 당시 최고의 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를 초빙하여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김익두 목사의 최초의 이적이 바로 1919년 12월 25일 현풍교회에서 일어났다. 거지 행각을 하며 살던 박수진이란 자가 있었다. 10년 전 사고로 아래턱이 떨어져 음식도 누워서 먹던 자였다. 김익두 목사는 그를 불쌍히 여겨 금식하며 기도했는데 박수진의 아래턱이 올라가 붙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에 감격한 박수진이 온 동네를 뛰어 다니며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여 온 동네가 놀라게 되었다. 김익두의 신유의 역사는 이후 계속되어 곱사등이 소녀가 등이 펴지기도 하고 소경이 눈을 뜨기도 하였다. 이런 사건들을 『동아 일보』 58호에서는 「김익두의 이적」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후 1923년에 2대 장로로 이규천이 장립하여 당회가 계속하여 보강되었으며, 1931년에 3대 장로로 최영섭이 장립함으로 당회원이 되었다. 현재 현풍교회는 송일두 목사가 시무하고 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교회 내 오케스트라를 편성하여 지역민을 위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하고 있다.
[현황]
2010년 106주년 행사를 맞아 지역민을 초청하여 공연하는 등 지역 사회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기독교의 전파와 더불어 대구광역시 달성군 최초로 설립된 교회로서 달성 지역 기독교 역사를 파악하는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크다. 더군다나 3·1 운동과 관련된 사실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파악하는데도 도움이 되리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