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12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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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潔 |
이칭/별칭 | 곽결(郭潔),곽청(郭淸),곽형(郭泂),곽호(郭浩)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홍수 |
[정의]
조선 전기 달성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현풍(玄風). 아버지는 선비 곽재훈(郭再勳)이다.
[활동 사항]
곽재훈은 곽결(郭潔)을 비롯한 곽청(郭淸), 곽형(郭泂), 곽호(郭浩)라는 네 아들을 두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훈이 살던 마을도 왜적의 침략으로 참화를 입게 되었다. 그래서 곽재훈의 네 아들은 아버지를 데리고 마을의 동쪽에 있는 유가산의 동굴 속으로 피란을 갔다. 그런데 왜적들이 그 동굴 앞을 지날 때 곽재훈이 갑자기 심한 기침을 하여 발각될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자 맏아들인 곽결이 마치 자기가 기침을 한 것처럼 하며 동굴 밖으로 나가 나머지 사람들을 구하였다. 하지만 한번 터진 곽재훈의 기침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둘째 아들인 곽청이 맏아들과 같은 행동으로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렇게 해서 셋째 아들과 넷째 아들이 차례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왜적의 칼날을 스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네 아들이 모두 죽고도 곽재훈의 기침은 멎지 않았다. 의아하게 여긴 왜적들이 동굴 속에 혼자 남은 곽재훈을 보고서야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왜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참으로 가슴을 찡하게 하는 지극한 효자로다. 아버지를 살리려고 앞을 다투어 나와서 죽다니……”
비록 적이기는 하나 왜적들도 아버지를 구하려는 네 아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곽재훈을 석방하며 그의 등에 '사효자지부(四孝子之父)'라는 다섯 글자의 패를 달아 주어 더 이상 다른 왜병들의 해를 입지 않도록 해 주었다.
전쟁이 끝나고 이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선조(宣祖)는 정문(旌門)을 내려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하고, 마을 사람들은 유가산의 그 동굴에 사효굴(四孝窟)이라는 글자를 새겨 네 형제의 효행을 길이 전하고자 하였다.
[묘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쌍계리 등산 옆 능선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곽결 형제의 정려(旌閭)는 현풍 곽씨 문중의 다른 정려들과 함께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지리 1348-2번지에 위치한 현풍 곽씨 십이정려각(玄風郭氏十二旌閭閣)에 봉안되어 있다. 현풍 곽씨 십이정려각은 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29호로 지정되었다. 곽결 형제를 추모하는 재사(齋舍)인 경효재(景孝齋)가 있다. 훗날 마을 사람들이 곽결 형제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유가산의 굴 앞에 있는 바위에다 사효굴이라고 새긴 사효자비(四孝子碑)가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양리에 있다. 곽결 형제의 행적을 찬술한 「효자 사공 찬(孝子四公贊)」이 곽종석(郭鍾錫)[1864~1919]의 『면우집(俛宇集)』 권144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