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12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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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錡 |
영어공식명칭 | Jeong Gi |
이칭/별칭 | 정보(靖甫),금재(琴齋)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홍수 |
[정의]
조선 후기 달성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정보(靖甫), 호는 금재(琴齋). 증조할아버지는 어모장군(御侮將軍)[정삼품] 정세검(鄭世儉)이고, 할아버지는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이고, 아버지는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1553~1594]이다.
[활동 사항]
정기(鄭錡)[1574~1642]는 어려서부터 과거 시험을 통해 벼슬자리에 나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오로지 가통(家統)을 잇고 예의를 숭상하며 학문을 탐구하는 데 전념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을 잘 가르치고 타일러 올바른 길로 이끄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아 사우(士友)들의 추앙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정기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극진히 모시고 명을 받들면 공경히 따랐는데, 정기의 그런 모습을 보고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칭찬하기를 “효자 집안에 또 효자가 났다.”고 하였다.
한강 정구와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의 문하에 입문하여 수학하였다. 당시 제현(諸賢)인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사월(沙月) 유시번(柳時藩), 동고(東皐) 서사선(徐思選), 도곡(陶谷) 박종우(朴宗祐) 등과 도의로써 교유하며 학문을 강론하였다. 저서로는 시문집(詩文集)인 『금재일고(琴齋逸稿)』가 전하고, 목활자본 2권 1책으로 1933년에 간행되었다.
[묘소]
대구광역시 북구 복현동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조선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한 후 당시 대구에 살던 정기를 비롯한 여러 선비들이 팔공산에 은거하였는데, 그들을 대명동 14현(大明洞十四賢)이라고 통칭한다. 1882년(고종 19) 대명동 14현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경현당(景賢堂)이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1084번지 아양 아트 센트 동쪽 담과 붙은 야트막한 언덕에 있다. 도신징(都愼徵)[1611~1678]의 『죽헌집(竹軒集)』 권3에 정기의 행장(行狀)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