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1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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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箕贊 |
영어공식명칭 | Song Gichan |
이칭/별칭 | 송정덕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활동 사항]
송기찬(宋箕贊)은 일제 강점기에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910년대 후반 20살이 되기 전에 중국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중국 만주에서 몇 년을 보낸 뒤에 귀국길에 올랐다. 1920년 2월 국내로 돌아오는 길에 폭탄 습격을 기도한 불령선인(不逞鮮人)[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 일제에 저항하는 조선 사람]으로 경찰에 잡혀 6개월간 구금을 당하였다. 송기찬을 비롯한 사건 연루자 7명은 폭탄을 이용하여 중요 관공서의 파괴와 조선 총독부 주요 조선인 관리 암살을 목표로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게 탄압을 받았다. 송기찬은 1920년 귀국길의 폭탄 사건 연루 뒤 1922년 9월 『동아 일보』 대구 지국에서 기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 후 서상일과 함께 30년간 언론계에 종사한 터줏대감이 되었다. 송기찬은 『동아 일보』 대구 지국에서 대구의 민족 비교를 통해 대구가 일본인의 도시로 전락해 있음을 각종 통계와 도시 경관, 각종 사회 현상 등을 통해 증명해 보였다. 나아가 대구 조선인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곧 지주와 자본가 등 부호와 노년층에게는 각성을 촉구하였으며, 신흥 사회 계층의 성장에 주목하면서 대구 구락부, 대구 상공 협회 등을 만들어 그들의 활동 공간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1928년 무렵, 대구 고등 보통학교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의 비밀 결사 사건, 대구 노동회 사건, 울릉도 설화 사건, 김창숙 검거 송치 사건 등을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취재하였다. 특히 송기찬의 관심사는 식민지 시대 사회 문제였다.
송기찬은 언론 활동을 하면서도 대구의 본격적인 노농 운동 단체인 대구 노동 공제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 1월에 열린 대구 노동 공제회 제5회 정기 총회에서 15명의 집행 위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고, 소작인의 권익 옹호 방안을 논의하였다. 송기찬은 1924년 사상 단체인 상미회(尙微會) 회원이자 대구 노동 공제회 회원으로서 남선 노농 동맹 결성 대회에 참가하였다. 상미회는 1924년에 이르러 정오회(正午會)로 개칭하였다. 1924년 3월 8일부터 이틀 동안 대구의 만경관(萬鏡館)에서 개최된 남선 노농 동맹 창립 총회에 참석하여 제1회 발기 회의록을 낭독하였다. 이처럼 송기찬은 대구 노동 공제회와 상미회에서 전국적인 노동 운동 단체의 결성과 지역 사회 노농 운동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저술 및 작품]
송기찬은 『동아 일보』를 통해 식민지 시대 사회 문제를 지적하였는데, 주요 기사로는 「밀양군청(密陽郡廳) 이전 반대 운동 맹렬, 군민 대회는 금지」[『동아 일보』 1927. 5. 7], 「한재(旱災)의 경상북도(1∼34)」(『동아 일보』 1928. 9. 18∼1928. 11. 24), 「박간(迫間) 농장」(『동아 일보』 1932. 2. 9∼1932. 2. 14), 「눈 속에 묻힌 가지가지 애화(哀話)」(『동아 일보』 1934. 2. 18), 「동해 해산 운수차 대구 영천 경궤도시승」(『동아 일보』 1926. 6. 24∼1938. 7. 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