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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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공식명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선사/석기,선사/청동기,선사/철기,고대/초기 국가 시대,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달성 지역의 역사.
[개설]
달성 지역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대구 월성동 유적(月城洞遺蹟)을 통해 후기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달성군의 역사는 대체로 대구의 역사와 함께 살펴보아야 하며, 대구에서 분리되었던 시기[1914~1995년]는 독립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대구는 예로부터 달구벌(達句伐), 달구불[達句火], 달성(達城) 등으로 불려 왔다. 삼한 시대에는 변한에 속했으며, 신라의 세력이 커지면서 5, 6세기경에 신라에 속하게 되었다. 757년에 수창군(壽昌郡)의 한 현인 대구현(大丘縣)으로 개칭되었다. 후삼국 시대 달성 지역은 신라를 차지하기 위하여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고, 927년(태조 10)에는 고려와 후백제군과의 유명한 싸움인 공산성 전투가 있었다. 1143년(인종 21) 대구는 현령이 파견되는 영현으로 승격하였다.
조선 초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하였다. 1466년(세조 12)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인 1601년(선조 34) 경상 감영(慶尙監營)이 대구로 이전되었다. 1885년(고종 22) 도호부인 대구가 군이 되고 현풍군 등 21개 군을 대구부가 관할하게 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시가지는 대구부로 하고 외곽지 전부와 현풍군을 폐합하여 달성군이라 칭하였다. 1995년 3월 1일 전국 행정 구역 개편으로 경상북도 달성군이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다. 2016년 현재 행정 구역은 3읍 6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달성군의 역사를 선사 시대, 고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근대, 현대로 나누어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사 시대]
달성 지역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후기 구석기 시대 전후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대구 월성동 유적에서 좀돌석기[細石器]를 포함한 석기 제작장이 조사된 예에서 찾을 수 있다. 신석기 시대 문화는 달성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전의 달성 지역에 속하였던 진천천 유역으로 월성동 유적, 상인동 유적, 대천동 유적, 금호강 유역의 달성군 달천리 유적(達川里遺蹟), 북구 대림동 유적, 사복동 유적, 동화천 유역의 북구 서변동 유적(西邊洞遺蹟) 등이 신석기 중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유적이다.
달성 지역의 청동기 시대 문화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보다 훨씬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고인돌은 달성군의 화원읍, 봉산동에서 수성면[지금의 수성구 상동]에 이르는 지역, 달성군 가창면, 논공읍, 유가읍 등에 밀집되어 있다. 또한 이들 지역에 민무늬 토기, 집자리를 포함한 대규모 마을 유적이 집중 분포하고 있다. 초기 철기 시대의 유적도 달성군에서 발견된다. 이전의 달성 지역이었으나 현재는 대구광역시에 속하는 달서구 월성동, 서구 비산동 유적(飛山洞遺蹟), 서구 평리동 유적(坪里洞遺蹟), 동구 신천동 유적, 동구 각산동 유적(角山洞遺蹟), 수성구 만촌동 유적(晩村洞遺蹟), 수성구 지산동 유적, 북구 서변동 유적 등이 대표적인 초기 철기 시대 유적이다.
[고대]
달성 지역은 달구벌국이라는 소국의 무대였고, 위화군, 팔거리현(八居里縣), 다사지현 등의 역사가 펼쳐진 곳이었다. 이들 역사는 기원 전후한 시기의 읍락, 국읍이었다. 특히 달구벌국은 국읍과 몇 개의 읍락으로 구성되었으며, 계층 분화와 관료 조직이 있어 역역(力役)을 부담 지을 수 있는 사회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뒤 달성 지역은 골벌국(骨伐國), 사벌국(沙伐國) 등이 병합된 3세기 중엽 이전에 신라에 복속되었다. 달성을 끼고 있는 낙동강 유역에서는 신라와 가야의 문화 유적이 다양하게 발견된다. 4세기 대의 달성군 다사읍 소재 문양리 고분 떼, 5세기 전반에서 6세기 중반의 문산리 고분 떼,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의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 고분 떼와 다사읍의 죽곡리 고분 떼,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대의 설화리 고분 떼 등이 있다.
신라 시대 신문왕(神文王)[?~692]은 689년(신문왕 9)에 수도인 경주가 동쪽에 치우쳐 있어 가야와 백제 등 서쪽 진출의 요충지인 대구·달성 지역으로 도읍을 옮기려 하였다. 신라는 지금의 달성군 현풍읍인 현효현(玄驍縣)에 9주 10정 중 삼량화정(三良火停)을 주둔시켜 달성 지역을 지정학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후삼국 시대 달성은 공산성 전투에서 알 수 있듯이 후삼국 간의 치열한 전장이었다. 이 전투는 후백제가 신라의 경주를 압박할 때, 위기를 느낀 신라가 고려의 왕건(王建)에게 구원을 요청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고려의 왕건은 후백제군에 참패하여 달성을 거쳐 성주로 옮겨 갔다.
[고려 시대]
고려 시대에 달성은 동경 유수관의 속읍인 수성군·해안현(解顔縣)과 밀성군의 속현인 현풍현(玄豊縣), 상주목 관내인 경산부(京山府)[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의 속현인 대구현(大丘縣)·하빈현(河濱縣)·화원현(花園縣)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12세기 전반 인종 대에 대구가 주읍으로 승격하였으며, 이에 주변의 화원현과 하빈현을 속읍으로 거느렸다. 고려 후기 달성에는 왜구의 잦은 출몰에 1390년(공양왕 2) 수성군에 감무가 파견되어 해안현을 겸장하였고, 같은 해 현풍현에도 감무가 파견되어 구지산 부곡을 예속하게 하였다.
[조선 시대]
조선의 지방 관제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1419년(세종 1) 5월에는 대구현을 대구군으로 승격하였으며, 대구군의 속현은 수성현(壽城縣), 해안현, 하빈현이었다. 1466년에는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처럼 달성은 조선 시대 대구부(大邱府)로 편성되어 현감을 두었다. 임진왜란 당시 달성은 왜군의 북상로 가운데 중로(中路)의 요지였고, 부사 윤현(尹晛)은 왜군을 맞아 싸우지 못하고 군민을 모아 공산성에 퇴진하였다. 이때 현풍현 솔례의 곽재우(郭再祐)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맞서 싸웠다. 또 임진왜란 때 왜장이었으나 조선에 귀화한 김충선(金忠善)이 있었다. 그리고 화원현 월촌 출신 우배선(禹拜善)은 의병을 일으켜 화원·달성·최항산에서 왜군과 싸워 전공을 올렸다.
달성[조선 시대 대구 도호부와 현풍현]의 인구는 17세기 이후 증가 양상을 보이고 있다. 농업의 경우 전국에서 이앙법이 가장 일찍 실시되고 있었고, 이를 위한 저수지가 19세기 후반에 180개 정도로 많았다. 장시의 경우 대구부에 9개, 현풍현에 2개 등 11개가 5일장으로 열리고 있었으며, 이들 장시는 낙동강 교역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근대]
근대 달성과 대구에는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이 급속하게 침해되는 상황에서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한 계몽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06년(고종 43) 자생적 계몽 운동 단체로서 대구 광문사(大邱廣文社)와 대구 광학회(大邱廣學會)가 흥학설교(興學設校), 식산흥업(殖産興業)을 표방하며 근대 개혁을 실시할 때 달성 출신 인사들의 참여가 적극적이었다. 또한 1907년(순종 1)에 현풍 단연 동맹회와 같이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계몽 운동은 1908년(순종 2) 대한 협회 대구 지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또한 일제에 대한 무력 항쟁인 의병 항쟁에 경상북도 북부와 충청남도 공주 일원에서 참여하였다. 1910년(순종 4)에 일제는 조선을 강제 병합하고, '조선의 일본화'라는 동화주의 원칙에 의거한 조선 통치의 방침을 내세워 식민 지배하였다. 1914년 일제는 대구의 시가지를 대구부로 설정하고, 그 밖의 지역과 현풍을 병합하여 달성군을 편성하였다. 이때 달성군은 16개 면 173동으로 구성되었다. 1938년에는 달성군 수성면과 달성면, 성북면이 대구부로 편입됨으로써 달성군은 13개 면으로 줄어들었다.
달성군의 인구는 1928년의 경우 13만 3,000명 정도로 경상북도 인구 227만 명 중 5.8%를 차지하였다. 인구 중 산업별로는 농업 인구가 가장 많이 차지할 정도로 달성군은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그중 소작농의 비중이 86.2% 정도로 농민의 빈궁화가 심각하였다. 1928년 기준 달성군 생산 농작물은 보리, 쌀, 콩 등의 순서로 비중이 컸다. 달성군 생산 특용 작물은 면, 대마, 닥나무, 환, 검은깨, 왕골, 버들 등의 순서로 재배되었다. 또한 잠업의 경우 1916년의 생산액은 266석 정도였고, 1934년에는 5,395석으로 생산 규모가 크게 증가하였다. 달성군의 주요 시장을 1934년 기준으로 보면, 백안시와 하빈시, 화원시, 해안시, 김포시, 구천시, 구지시 등 7개의 시장이 열렸다. 달성군은 농업 생산물을 주로 공급하고, 대구는 각종 농산물의 소비지이자 농산물을 가공하거나 일본 수출 물류지가 되었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 맞서 달성군에서는 3·1 운동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민족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독립의 기틀이 세워졌다.
[현대]
1945년 8·15 광복은 달성군의 역사를 새롭게 진전시켜 나갔다. 달성군의 땅은 일제 시기와 큰 차이 없이 유지되었고, 자주적 국민 국가 건설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도 달성군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958년 달성군의 동촌면, 공산면, 가창면, 성서면, 월배면이 대구시로 편입되어 달성군은 8개 면으로 줄어들었다. 1963년에는 대구시로 편입된 공산면, 가창면, 성서면, 월배면 등 4개 면이 다시 달성군의 땅으로 되었다. 경제 개발 계획과 함께 달성군도 도시화가 크게 진전되어 갔다. 1977년에 대구와 마산을 잇는 구마 고속 도로의 개통과 88 고속 도로의 개통은 달성 군민의 생활을 크게 변화시켰다.
2016년 기준 달성군의 면적은 426.67㎢로, 그중 임야는 260.5㎢로 61%를 차지하고 경지 면적은 89.8㎢로 21%를 차지하였다. 경지 면적 중 논과 밭의 비율은 72:28로 논농사가 중심을 이루었다. 달성군은 대구광역시의 근교 농업 지역으로서 일찍이 작물 농업과 비닐하우스 농업이 발달하여 배추·무·참외·수박·마늘·고추·양파·토마토 등의 채소류와 특용 작물 참깨의 재배가 활발하다. 축산업도 근교 농업의 일환으로 한우는 달성군 구지면, 젖소와 염소는 가창면, 돼지와 닭은 하빈면 등을 중심으로 많이 사육되고 있다.
달성군의 산업 기반은 1979년 달성 산업 단지[농공 산업 단지]가 마련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성되었다. 뒤이어 옥포 농공 단지, 구지 농공 단지 등의 농공 단지와 달성 2차 산업 단지, 현풍 기계 공단 등이 조성되어 지역 경제의 활성화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달성 2차 산업 단지가 조성되기 이전 달성군의 산업은 1차 산업이 10%, 2차 산업이 59%, 3차 산업이 31%로 구성되었다. 주요 업종은 섬유·자동차 부품·농기계·식품·화학 등이다. 섬유업이 주된 업종이고, 기계업도 높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2002년 기준 302개 업체가 입주하였으며, 그중 섬유업체가 106개로 가장 많고 조립 금속 85개, 석유 화학 35개, 1차 금속 21개 등의 순이다. 대구 성서 3차 산업 단지와 달성군 구지 공단에 자동차 산업이 입지함에 따라 성서-위천, 달성-구지를 잇는 지역에 자동차 산업 벨트 조성 계획을 세웠다. 2008년 기준 총 1만 803개 업체 중 제조업이 2,822개 업체[26.1%]로 가장 많고, 도매업·소매업이 2,123개 업체로 19.7%, 숙박 및 음식점이 1,685개 업체로 15.6%, 운수업이 1,264개 업체로 11.7%의 비중을 차지하였다.
2009년 9월 달성군 구지면에 8.52㎢ 규모의 대구 국가 과학 산업 단지가 공식 지정되어 2018년 완공을 목표로 조성 중이다. 대구 국가 과학 산업 단지에는 차세대 전자·통신, 첨단 기계, 미래형 자동차 등이 입주하게 되어 14만 명 정도의 고용 유발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된다. 달성군은 국가 과학 산업 단지를 중심으로 대구 테크노폴리스와 달성 1차 산업 단지·달성 2차 산업 단지, 현재 조성 중인 성서 5차 첨단 산업 단지를 한데 묶어 낙동강 신사업 벨트를 구축하여 대구 경제를 이끌 중심축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대구 경북 과학 기술원 조성, 국립 대구 과학관 건립, 지능형 자동차 부품 시험장건립, 한국 전자 통신 연구원 대구 분원 및 한국 생산 기술 연구원 대구 분원 등 연구 기관과 각종 연구 개발 관련 기관 유치도 진행되고 있다.
더불어 달성군은 지역 농업 여건 개선을 위해 지역 특화 사업 개발과 친환경 농업, 첨단 기술 농업 육성 및 문양역 농산물 직판장과 농기계 임대 사업장 개장, 대니골 농촌 마을 종합 개발 사업 등을 추진 중에 있다. 특히, 참달성을 브랜드화하여 지역 농산물 및 특산물을 홍보·판매하는 등 농업 경제의 활성화와 소득 향상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