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4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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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巴里藏書運動 |
이칭/별칭 | 독립 청원서 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19년 유림단의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보낸 독립 청원 운동.
[역사적 배경]
3·1 운동 의 전국적 확산과 1919년 2월 친일 세력과 경성의 일부 친일 유림이 야합하여 합방 절대 지지 한일 불리 청원서(合邦絶對支持韓日不離請願書)를 일왕에게 보내려던 음모가 폭로되면서 유림의 독립 청원 운동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달성군에서도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제출한 독립 청원 운동이 독자적으로 진행되다가 유림의 독립 청원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경과]
1919년 달성군에 사는 우하교(禹夏敎)는 “금년 음력 2월 초순경부터 조선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발발하여 조선 민족은 모두 조선 독립을 희망하고 조선도 독립의 추세로 향하고 있으므로, 이때 파리 강화 회의 및 조선 총독 등에게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면 반드시 독립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우하교는 스스로 독립 청원서를 작성한 후에 달성군 가창면에 사는 조긍섭(曺肯燮)을 만나 독립 청원에 관한 내용을 보완하였다. 이후 우하교는 성주의 장석영(張錫英)에게 찾아가 독립 청원서에 관해 상의하였다. 그 자리에서 장석영은 우하교에게 자신들도 이미 파리 강회 회의 및 조선 총독 등에게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여 현재 거창의 곽종석(郭鍾錫)이 그 청원서를 기초 중인데 되는 대로 경상남북도, 충청도의 일부 유학자와 함께 연합하여 연서하고 성주의 김창숙으로 하여금 파리 회의에 보낼 계획이라고 하였다.
이에 달성의 윤상태(尹相泰) 등이 계획한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낼 독립 청원 활동은 변경되어 유림단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이후 완성된 ‘파리 장서’가 장석영에게 보내지자, 장석영은 정종호(鄭宗鎬)를 통해 윤상태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대구에 도착한 정종호는 우하교를 만나 윤상태에게 독립 청원서를 전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우하교를 통해 독립 청원서를 전달받은 윤상태는 서상일·김응섭 등과 상의를 거친 뒤 경상북도 대표로 상해 임시 정부로 파견될 김응섭에게 영문으로 번역하게 하여 번역 문안을 파리 강화 회의에 전달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과]
1919년 4월 경상북도 성주의 만세 시위 운동에 관련되어 일본 경찰에 붙잡혔던 송회근(宋晦根)에 의해 사건이 발각됨으로써 관계자들이 체포되거나 국외로 망명하였다. 1919년 8월 윤상태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우하교는 일본 경찰에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윤상태의 대구 지방 법원 예심에 증인으로 나서 독립 청원 관련 사실을 부인하다가 같은 해 10월 위증죄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