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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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桐華寺 地方學林 萬歲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봉숙 |
[정의]
1919년 3월 30일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이 전개한 만세운동.
[역사적 배경]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한용운을 비롯한 불교계 지도자들의 3·1 운동 참여는 중앙 학림[현 동국 대학교] 학생들에게 이어졌다. 중앙 학림 학생들은 조직적으로 각자 연고가 있는 지역의 사찰로 내려가 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할 것을 결의하였다.
[경과]
중앙 학림 학생인 윤학조(尹學祚)는 3월 1일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고향인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진인동으로 내려왔다. 3월 23일 동화사 지방 학림[현재 동화사 승가 대학] 학생이었던 권청학·김문옥 등을 만나 불교계의 만세운동 참여 소식을 알리고, 만세운동을 권고하였다. 처음에는 달성군 공산면 백안동 백안 시장에서 궐기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장터가 좁고 사람도 적어 효과가 적을 것이므로 대구에서 단행하기로 합의하였다.
3월 28일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 이성근(李成根)·김문옥(金文玉)·이보식(李普湜)·김종만(金鍾萬)·박창호(朴昌鎬)·김윤섭(金潤燮)·허선일(許善一)·이기윤(李起胤)·권청학(權淸學) 등이 동화사 심검당(尋劒堂)에 모여 만세 운동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고 3월 30일 대구 덕산정 시장[남문 밖 시장] 장날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3월 30일 오후 2시쯤 학생들은 장터에 모인 3,000여 명의 군중들에게 미리 준비한 태극기 등을 나누어주었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군중과 행진하였다. 일본 군경들은 총칼로 이들을 즉각 해산시키고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 전원을 잡아갔다.
[결과]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은 4월 12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하였다. 5월 19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원판결이 부분 취소되었으나 다시 상고하였고 7월 3일 고등 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불교계의 3·1 운동 전개는 중앙 학림 학생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1 운동은 동화사,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 등 지역 사찰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동화사 지방학림 만세운동은 지방학림 학생 전원이 검거되어 투옥되었고 그 중 김문옥, 이기윤, 권청학은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적극적인 사료 수집과 연구 등을 통해 동화사가 의병과 경상북도 지역 불교계 독립운동의 본산이었음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