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4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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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達城郡- 良民 虐殺 現場 發掘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한국 전쟁 전후 달성군에서 자행된 양민 학살 현장에 대해 조사·발굴한 사건.
[역사적 배경]
한국 전쟁 전후 달성군에서 자행된 양민 학살은 사형 선고라는 법적인 근거 없이 국가 권력에 의해 자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법치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 따라 양민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은 반드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경과]
1960년 국회 특별 조사반이 진행한 달성군의 양민 학살 현장 발굴은 가창댐 부근, 파동, 상원동, 달성 광산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가창댐이 들어선 가창골에서는 댐 준공 때 18가마의 백골이 나타나 맞은편 산으로 이장하였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시신들은 한국 전쟁 직후 대구 형무소의 수감자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달성 광산의 경우 한국 전쟁 전인 1949년 3월 호림 부대원 양민 80여 명을 감금하고, 그중 20명을 빨갱이로 몰아 붙여 총, 칼 혹은 구타, 질식 등으로 살해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 대구 형무소 조사 때에는 1,402명의 수감자들이 군경에게 인도되었음이 밝혀졌고, 그들은 가창, 파동, 달성 1구 광산, 신동 고개, 경산 코발트 광산 등지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에서도 가창을 비롯한 송현동, 상인동, 고모동, 만촌동 등지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해 학살당한 민간인의 시신을 발굴하였다.
[결과]
달성군 양민 학살 현장에 대한 조사와 발굴 결과 가창과 파동의 경우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의 발굴 작업의 결과와 같이 달성군 일원에 걸처 양민 학살이 자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한국 전쟁 전후 달성군에서 이루어진 양민 학살의 현장에 대한 조사·발굴은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는 역사적 작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