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605 |
---|---|
한자 | 花山書院 |
영어공식명칭 | Hwasanseowon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화산리 898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백지국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화산리에 있는 현대에 건립한 서원.
[개설]
화산서원(花山書院)은 규현(揆軒) 곽승화(郭承華)[?~?], 죽재(竹齋) 곽간(郭趕) [1529~1593], 예곡(禮谷) 곽율(郭𧺝)[1531~1593], 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1547~1615]을 배향하고 있다. 곽승화의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자실(子實)로 달성군 현풍읍 대리에 있는 이양 서원(尼陽書院)에 배향된 곽안방(郭安邦)의 둘째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굉필과 함께 그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도동 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에 위패가 봉안되었으나, 흥선 대원군 집권기 때 훼철되었다. 곽간의 자는 원정(元靜), 곽승화의 증손자이다. 1546년(명종 1)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다. 형조 좌랑(刑曹佐郞),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강릉 부사(江陵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죽재 문집(竹齋文集)』이 있다.
곽율의 자는 태정(泰靜), 아버지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인 곽지인(郭之仁)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도동 서원 별사에 봉향되었다. 저서로 『예곡집(禮谷集)』이 있다. 곽재겸의 자는 익보(益輔), 선무랑(宣務郎) 곽초(郭超)의 아들이다. 작은아버지 곽월(郭越)에게 글을 배우다가 전경창(全慶昌)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한 뒤 정구(鄭逑)와도 종유(從遊)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적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향리에서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
[위치]
화산서원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화산리 898번지에 있다. 구지면사무소 정문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28m 직진 후 좌회전하여 창리중앙2길을 따라 416m 직진한 뒤 우회전하여 약 900m 이동 후 갈림길에서 좌회전한다. 다시 과학북로를 따라 631m 직진한 후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 150m 이동하면 민가 뒤 화산 산자락에 화산서원이 있다.
[변천]
화산서원은 1990년 건립되었다. 이보다 앞서 화산재(花山齋)가 존재하였다. 서원 내 현판인 화산재 중건기(花山齋重建記)를 보면 “화산촌 남쪽 송추(松楸) 아래 5칸 기와집이 웅장하고 화려하게 서 있는데 화산재라 편액되었다. ……경인년[1950] 병란 때 4칸 정당(正堂), 오른쪽 돈대 아래의 3칸 고사(庫舍)가 모두 불타 버리고, 왼쪽의 3칸 문무(門廡)만 남았다. ……규헌공파(揆軒公派) 종중이 분연히 힘을 내어 4칸 재사(齋舍)를 무너진 초석 위에 다시 세웠다. ……무신년[1968] ……일제히 재물을 모아 ……규모를 넓혀 5칸을 축조하여 동편에 1실, 서편에 2실, 가운데 2당(堂)을 만들었다. 이어서 정장의 예전 목재로 고사 3칸을 옛터에 축조하여 방 두 개와 주방 하나를 만들었다. 7년 뒤 을묘년[1975] 3칸 행랑을 돈대 아래에 증축하고 정면에 발을 만들었다”라고 되어 있다. 자료의 소략으로 언제부터 화산재가 존재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화산서원이 건립되기 이전부터 화산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6·25 전쟁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이후 후손들에 의해 중건되었다. 달성군 구지면 화산리에 화산재가 건립된 것은 곽승화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화산서원 창건 당시에도 곽승화, 곽간, 곽율, 곽재겸이 도동 서원의 별사와 유호 서원 등 곳곳의 서원에 모셔졌으나, 흥선 대원군 집권기 때 대부분 훼철되자 이에 네 사람의 향사를 회복하는 논의가 예연 서원 회중에 제기되어 곽승화의 묘소 밑에 사당을 창건하여 화산서원을 건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형태]
화산서원은 화산 산자락에 위치한다. 산의 경사를 따라 경사지에 배치하였다. 건물 맨 위쪽 내삼문과 사당인 경덕사(景德祠)가 있고, 그 아래 강당과 강당을 바라보고 주소(廚所)와 담장, 문이 있다. 오른쪽에는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