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6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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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玄風 鄕校 |
영어공식명칭 | Hyunpunghyanggyo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현풍동로20길 27-8[상리 326-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지국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상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관학 기관.
[개설]
현풍 향교(玄風鄕校)는 조선 시대 지역 유생들이 머물며 수학한 관학 기관이다. 건립 연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조선 초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교적 사상과 이념, 습속을 지역 내에 전하기 위한 유교 문화의 거점으로서 교육 기능 외에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제향적 기능, 향교를 출입하던 현풍의 재지 사족들의 향론을 형성하는 향촌 자치 기구로 활용되었다.
[위치]
현풍 향교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현풍동로20길 27-8[상리 326-1]에 있다. 현풍읍사무소와 현풍 초등학교 사잇길[부리2길]을 따라 약 150m 이동한다. 대구 시립 달성 도서관에서 우회전하여 다시 약 150m 가서 좌회전한 뒤 현풍동로21길을 따라 약 350m 이동 후 좌회전한다. 현풍동로20길을 따라 50m 가면 왼쪽에 현풍 향교가 있다.
[변천]
자료의 소략으로 현풍 향교의 건립 연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향교 현의 북쪽 1리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조선 초에는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변천은 『사적록(事績錄)』을 통해 간략하게 확인할 수 있다. 현풍 향교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현풍 현감 이영도(李詠道)가 옛 교동(校洞)에 중건하였다. 1758년(영조 34) 현감 김광태(金光泰)가 다시 임진왜란 이전의 위치로 옮기면서 규모를 확대하였다. 그 후 1857년(철종 8)과 1872년(고종 9)에 중수되었다. 1882년(고종 19)에는 여제당(厲祭堂)을 중수하고, 1901년(고종 38)에 현감 허고(許估) 등이 여제당을 중건하였다. 1918년 동무·서무, 1931년 군수 신현구(申鉉求)가 재직할 때 대성전, 동무·서무, 명륜당 등을 중수하였다. 이후 1942년 대성전 중수, 1969년 명륜당 보수, 1974년 대성전·명륜당 및 단청 보수, 1975년 동무·서무, 1978년 내삼문, 1979년 외삼문을 각각 중수하였다. 1982년에도 향교를 중수하였다.
[형태]
상동(上洞) 마을 뒤쪽 나즈막한 산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대지를 3단으로 조성하여 대성전과 명륜당이 축을 이루면서 좌우에 동무·서무, 동재·서재를 각각 배치한 전학 후묘(前學後廟) 형태이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연화문이 있는 배례석과 면석 등의 석재로 기단을 구성하고 윗면에는 전을 깔았다. 전면에는 연화문을 새긴 주초석을 사용하였고, 후면은 자연석 덤벙 주초와 탑신석을 주초로 사용하였다. 가구(架構)는 2고주(高柱) 오량가(五樑架)이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중앙에 대청으로 좌우에 협실을 둔 중당 협실형(中堂挾室形)이다. 상부 가구는 오량가의 견고한 구조이다. 동무·서무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는 통문으로 이루어졌으며, 기둥은 원주(圓柱)를 사용하였다. 동무·서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동재는 현재 주사(廚舍)로 사용되며, 좌측 칸은 부엌으로 개조되었다. 내삼문·외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현황]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동무·서무, 명륜당, 동재·서재 내삼문·외삼문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송조 4현(宋朝四賢)을 배향하고, 동무·서무에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을 배향하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석전(釋奠)을 봉행한다. 대성전은 1985년 8월 5일 문화재 자료 제25호로 지정되었다가 1995년 5월 12일 지정 해제되고, 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27호로 지정되었다. 명륜당 앞에는 김광태 기적비(金光泰記績碑)가 세워져 있다. 경내에는 각종 탑재와 석등재가 산재해 있으며, 이들 탑재들은 현 향교의 건물 기단과 주초석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소장 자료로는 『사적록』을 비롯하여 『청금록(靑衿錄)』, 『도유사안(都有司案)』, 『재천록(齋薦錄)』, 『본교매답전식본기(本校賣畓錢植本記)』, 『향교매답전각면식본성책기(鄕校賣畓錢各面植本成冊記)』 등이 있다. 『사적록』은 1759년부터 1990년까지 232년간의 사적(事績)을 기록한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금록』은 현풍 향교에서 수학한 유생들의 명단인 교안(校案)으로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유사안』은 역대 현풍 향교의 도유사(都有司) 명단으로 1책 21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1632년(인조 10) 9월부터 1838년(헌종 4)까지 도유사의 성명을 수록하였는데, 대부분 역임 연대를 알 수 없다.
『재천록』은 1683년(숙종 9)부터 1699년(숙종 25) 사이 현풍 향교에세 작성한 장의(掌議) 추천 기록으로, 1책 16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료는 총 16회에 걸쳐 이루어진 장의 추천 기록으로 추천된 인사의 성명을 기재한 뒤, 그 뒤나 아래에 해당 인사를 추천한 천주(薦主)의 성명을 기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교매답전식본기』는 1891년(고종 28) 현풍 향교에서 전답을 방매한 뒤, 그 돈으로 고을의 각 면에 식리(殖利)를 놓기 위해 작성한 장부와 절목(節目)이다. 1책 19면으로 구성되었다. 『향교매답전각면식본성책기』는 1891년 현풍 향교에서 전답을 방매한 뒤 그 돈으로 식리를 놓으면서 작성한 명부이다. 1책 19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풍 향교는 경북 향교 재단이 소유하여 관리한다.
[의의와 평가]
현풍 향교는 적어도 조선 초에 건립되어 현풍의 지역민을 교화하는 문화 기관인 동시에 인재를 양성하고 향론을 형성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 서원이 건립되면서 교육과 향촌 자치 기구로서의 기능은 약화되고 제향의 기능만 유지하였다. 현재에도 그 전통을 이어 석전제(釋奠祭)를 개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