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14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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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玄風 鄕校 所藏 古典籍 |
영어공식명칭 | Old Korean books collected by The HyeonPung Hyanggyo |
이칭/별칭 | 현풍 향교 고전적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현풍동로20길 27-8[상리 326-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상리의 현풍 향교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시대의 고문서와 필사본 일체.
[개설]
현풍 향교는 조선 초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다. 이후 현풍 현감 이영도(李詠道)가 중건하였다가, 1758년(영조 34) 현감 김광태(金光泰)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그 후 1857년(철종 8)과 1872년(고종 9)에 중수가 있었으며, 1882년(고종 19) 여제당 중수, 1901년 여제당 중건, 1914년 향교 중수, 1918년 향교 동서무 중수, 1931년 향교 중수, 1942년 대성전 중수, 1982년 향교 중수 등 수차례의 중수, 중건이 있었다.
현전하는 필사본으로는 1610년 『청금록(靑衿錄)』과 1766년 『도유사안(都有司案)』 및 『재천록(齋薦錄)』 등과 같이 임진왜란 이후 양반 교생과 도유사(都有司), 장의(掌議)로 대표되는 교임들의 명단이 있으며, 『본교 매답전 식본기(本校賣畓錢植本記)』와 『향교 매답전 각면 식본 성책기(鄕校賣畓錢各面植本成冊記)』 등과 같은 경제 관련 자료들도 남아 있다. 그 외에도 1759년부터 1990년까지의 향교 내 각종 중수, 중건 및 교육, 재정 운영과 관련한 사항을 정리한 『사적록(事績錄)』 등이 남아 있다. 고문서는 1786년 현풍현 향청에서 작성한 『향안 설립 초 정규 등초(鄕案設立初定規謄草)』가 있어서 향안 운영 관련 규정을 확인할 수 있으며, 1847년 『완의(完議)』는 향교에서 시행된 거접(巨接)의 시행 규례를 적고 있어서 향교 교육의 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
현풍 향교에서 향교 운영의 필요에 따라 제작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현풍 향교에서는 운영의 핵심이 되는 교임과 교생들의 명단을 작성하였는데, 이는 조선 시대 양반의 신분을 증명하는 것이자 향교의 인적 구성을 파악하기 위한 의도였다.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임진왜란 이후 현풍 향교를 중수한 직후인 1610년에 양반 교생들의 명단인 『청금록』을 작성하였다.
『향록(鄕錄)』은 현풍현 양반 사족들의 명단으로서 향교와 유향소[향청]에서 비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역시 양반 사족들의 신분을 증명하는 명부로서 기능하였는데, 현풍 향교에 남아 있는 『향록』은 1621년(광해군 13)에 처음 작성된 이래로 수차례 추록이 있었다.
『도유사안』은 현풍 향교를 실질적으로 운영하였던 교임들 중 향교를 대표하고 업무를 총괄하는 직임이었던 도유사의 명단을 적은 것으로, 유림의 공의를 거쳐 덕행과 학문을 갖춘 명망 있는 인사가 선정되었다. 1766년에 엮은 『도유사안』은 1632년부터 1838년까지의 역대 도유사 명단을 적은 것이다.
또한 도유사의 업무를 보조하고, 실질적으로 향교를 운영하였던 장의들을 추천한 명단인 『재천록』이 제작되었다. 1683년부터 1699년까지의 장의 추천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본교 매답전 식본기』와 『향교 매답전 각면 식본 성책기』 등은 향교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향교 토지를 매매한 후 식리(殖利)한 내역을 기록한 것으로서 투명하고, 계획적인 재정 운영을 위해 제작되었다.
『사적록』은 향교의 각종 공사 및 재정 운영 내역 등을 기록하여 향교 관리와 운영에 참고하기 위하여 1990년도에 제작한 것이다.
『향안 설립 초 정규 등초』는 1786년에 향안 등재와 향임(鄕任) 선출, 향임자의 직무와 제재 등을 규정한 후 작성한 것으로 향교와 향청 및 도동 서원에 각 한 부씩 보관하였다.
1847년 『완의』는 향교에서 시행한 거접의 원활한 시행을 위해서 거접과 관련한 각종 규례를 정한 것이다.
1992년 『경북 향교 자료 집성』1에 영인 간행되었다.
[형태/서지]
1. 『청금록』은 1930년 제작된 필사본 1책[11면]으로 1610년에 제작된 교안이 심하게 훼손되어 보수한 것이다. 크기는 세로 34㎝, 가로 25㎝이다. 내제는 '현풍관교안(玄風官校案)'이라 되어 있다.
2. 『향록』은 상하권의 2책으로 구성된 필사본으로 상권은 1621년부터 이후 추록을 통해 1851년까지 기재되어 있으며, 하권은 1814년부터 1851년까지 기재되어 있다.
3. 『도유사안』은 1766년 제작된 필사본 1책[22면]으로 1766년 10월 4일에 엄우광(嚴友光)이 기록한 서문이 있다. 크기는 세로 37.5㎝, 가로 26㎝이다. 내제는 '교임록(校任錄)'이라 되어 있다.
4. 『재천록』은 1683년부터 1699년까지의 장의 추천 기록으로 필사본 1책[9면]이며, 크기는 세로 32.5㎝, 가로 22.5㎝이다. 내제는 표제와 같다.
5. 『본교 매답전 식본기』는 1891년 제작된 필사본 1책[7면]으로, 크기는 세로 29㎝, 가로 18㎝이다.
6. 『향교 매답전 각면 식본 성책기』는 1891년에 제작된 필사본 1책[11면]으로, 크기는 세로 29㎝, 가로 17㎝이다.
7. 『사적록』은 필사본 1책[91면]이며, 크기는 세로 38㎝, 가로 27㎝이다.
8. 『향안 설립 초 정규 등초』와 『완의』은 낱장의 고문서로서, 크기는 미상이다.
[구성/내용]
1. 『청금록』의 표제(標題)에는 '청금록'이라 명기되어 있지만 이는 1930년에 훼손된 교안을 새롭게 단장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내제(內題)에는 '현풍관교안'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내용을 보면 교생으로 등록된 인사들을 먼저 수록하였으며, 이어 동몽(童蒙)과 입격자(入格者)를 수록해 놓았다. 교안을 단장한 이유는 자료의 말미에 별도로 기재해 놓았는데, 세월이 많이 흘러 포장된 종이가 거의 떨어져 나갔으며, 습기 등으로 수록된 글자를 명확히 볼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원본에는 활명(割名)된 자국이 있는데, 이 부분은 별도로 표시해 둔다고 하였다. 훗날 누군가에 의한 조작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의도이다.
교안에는 모두 23명이 수록되어 있으며, 일곱 군데에서 이름을 도려낸 흔적이 확인된다. 이 흔적을 포함하여 최초 교안에는 30명이 수록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규정한 현(縣) 소재 향교 정원인 30명과 동일하다. 교안에 입록된 입록자를 성씨별로 분류해 보면 곽씨(郭氏) 10명, 박씨(朴氏) 6명, 김씨(金氏) 4명, 엄씨(嚴氏) 1명, 채씨(蔡氏) 1명, 허씨(許氏) 1명 순으로 나타난다. 동몽은 6명이 확인되며, 입격자는 모두 16명이 확인되는데 성씨별로는 곽씨 7명, 김씨 5명, 박씨 2명, 엄씨 1명, 신씨(辛氏) 1명 순으로 나타난다. 본관별로는 현풍 곽씨, 서흥 김씨, 밀양 박씨, 영월 신씨 등이 대표적인데, 오늘날의 현풍 향교 출입 문중에서도 수위에 들어간다.
2. 『향록』은 1621년에 처음 작성되었는데, 이때 1610년의 『청금록』에 기록되었던 교생 5명의 명단이 『향록』에도 기재되어 있었는 것으로 보아서, 이들이 『향록』을 작성할 당시에 참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621년 이후 1636년, 1639년, 1640년, 1647년, 1651년, 1658년, 1659년, 1666년, 1667년, 1669년, 1673년, 1678년, 1679년, 1725년, 1733년, 1736년, 1752년, 1753년, 1754년, 1769년, 1791년, 1814년, 1829년, 1851년에 계속해서 추록(追錄)이 이루어졌다. 1621년의 명단을 보면 총 59명의 성(姓)이 기록되어 있는데, 곽씨(郭氏)가 27명으로 가장 많고, 김씨(金氏)가 20명으로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으며, 엄씨(嚴氏)와 박씨(朴氏)가 각 5명, 정씨(鄭氏)와 채씨(蔡氏)가 각 1명씩 기록되어 있다. 이후 추록되는 성씨들도 가장 많은 숫자가 입록되어 있는 곽씨와 김씨 외에도 엄씨(嚴氏), 박씨(朴氏), 배씨(裵氏), 나씨(羅氏), 채씨(蔡氏), 성씨(成氏), 정씨(鄭氏) 등의 기타 성씨가 1~2명씩 추록되어 나타나고 있다.
3. 『도유사안』은 1766년 처음으로 엮었는데, 1632년 9월부터 1838년까지의 향교 도유사들의 명단과 임기가 기록되어 있다. 1765년 도유사로 임명된 엄우광이 지은 1766년 10월 4일의 서문에 따르면 이전의 도유사 명부는 훼손이 심하여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많기에 다른 교임인 곽상후(郭相垕), 김석규(金錫圭)와 함께 새롭게 책을 만들어 명부를 정리하였다고 하면서, 이후 도유사로 임명된 인사들은 여기에다 성명과 임기를 추가 기재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렇기에 1766년 이전의 기록은 엄우광 등이 정리한 것이며, 그 후의 기록은 후임 도유사들이 추록한 것이다. 본 자료에서 확인되는 도유사 임명 횟수는 모두 244회로 나타난다. 이들 도유사를 성씨별로 분류해 보면, 곽씨(郭氏) 148회, 김씨(金氏) 52회, 엄씨(嚴氏) 18회, 박씨(朴氏) 9회, 배씨(裵氏) 6회, 성씨(成氏) 6회, 채씨(蔡氏) 4회, 나씨(羅氏) 1회 순이다. 이러한 성씨별 분포는 『청금록』,『향록』 등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되는데, 그 이유는 이들 성씨가 현풍 지역의 대표적 사족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4. 『재천록』은 1683년부터 1699년까지 16년 동안의 현풍 향교를 실질적으로 운영하였던 장의(掌議)를 추천한 기록이다. 천거는 1683년, 1685년, 1686년, 1688년, 1690년, 1691년, 1692년, 1693년, 1694년, 1695년, 1697년, 1698년, 1699년에 걸쳐 총 15회가 있었다. 1691년, 1694년에는 2회의 추천이 있었는데, 평균 추천 기간으로 보면 임기는 1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자료에는 모두 57명의 추천 기록이 나오는데 재천(齋薦)이 이루어진 연월, 추천된 자, 추천한 자의 성명을 함께 기재하고 있어서, 추후 천거된 자의 과실 시에는 추천한 자에게도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추천된 인사 57명의 성씨는 곽씨 29명, 김씨 10명, 성씨(成氏) 6명, 박씨 5명, 엄씨 3명, 배씨(裵氏) 2명, 채씨 2명 순으로 나타난다.
천주(薦主)는 26명이 참여하였는데 여러 차례에 걸쳐 천주가 되거나, 한 번에 여러 명의 인사를 천거하기도 했다. 이들 천주들은 곽씨 13명, 박씨 4명, 김씨 3명, 엄씨 3명, 성씨 1명, 배씨 1명, 채씨 1명으로 나타나는데, 이중 12명이 『도유사안』에서도 확인된다. 결국 천주는 전현직 교임 및 향내의 명망 있는 인사가 처음에는 3명씩을 천거하였는데, 후대로 갈수록 각각 1인씩만을 천거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장의의 비중도 여타 자료에서와 같이 곽씨의 주도하에 김씨 이하 성씨들이 참여하는 양상이었다. 자료 말미에 수록된 간통규(簡通規)는 추천된 인사의 합당 여부를 여러 댁(宅)에 묻는 서식이다. 편지에다 추천된 인사의 이름을 써서 여러 댁에 편지로 돌린 뒤, 답장 받는 형식으로 장의가 선출됨을 밝히고 있다. 즉, 선출에 참여하는 인사는 간통(簡通)이 오면, 그 이름을 본 뒤 합당하다고 판단될 경우 삼가 알겠다는 '근실(謹悉)'을 써서 답장하고, 불가하다면 답장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선출 방법을 규정해 놓았다.
5. 『본교 매답전 식본기』와 『향교 매답전 각면 식본 성책기』는 1891년에 제작된 치부책이다. 현풍 향교는 관리하기 어려웠던 전답을 방매하고, 마련한 1,300냥 가운데 1,000냥을 현풍현 내 16개 면에 배분하여 식리한 후 그 이익으로 향교에서 치러지는 각종 제례(祭禮) 등의 비용과 좋은 토지 매입비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이 두 자료를 작성하였다. 『향교 매답전 각면 식본 성책기』는 각 면별로 분배한 자금을 리(里)별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본교 매답전 식본기』에는 면별로 식리를 놓은 금액과 이들 자금의 운용에 관한 규정를 절목으로 작성하였다.
각 면별로 식리한 금액을 보면, 유가면 80냥, 진촌면 50냥, 모로면 60냥, 오설면 60냥, 돌산면 50냥, 논공면 40냥, 동부면 40냥, 서부면 20냥이며, 이상 8개 면에는 400냥을 빌려주고 봄과 가을에 반씩 수용(收用)한다고 규정하였다. 이어 마산면 83냥, 산전면 83냥, 우만면 83냥, 말역면 83냥, 묘동면 83냥, 구지면 83냥, 답곡면 60냥, 왕지면 42냥으로 이상 8개 면에는 600냥을 빌려주고 동지(冬至)에 이를 거두어들인다고 규정해 놓았다. 이를 합치면 총 1,000냥으로 확인된다.
이자를 놓은 자금의 운용 규정에 대해서는 절목에서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향교의 논이 척박하고 건조하여 작은 가뭄에도 매번 망치게 된다고 하면서, 함께 논의하여 향교의 논 반경(半耕)과 사용하지 않는 땅을 함께 팔아서 현풍현에 식본(植本)하여 이자(利子)를 거두어서 사용한다고 했다. 논을 판 돈은 1,200냥이며, 밭을 판 돈이 100냥인데, 그 중 300냥은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의 번와(翻瓦)와 고직(庫直)의 6개월치 급료로 사용하며, 400냥은 8면에 식본으로 하여 봄, 가을에 절반인 100냥씩 거두어 1년간 향교에 쓰는 것을 보조한다고 하였다. 또한 600냥은 8면의 식본으로 하여 동지에 마감할 때, 모두 거두어들여 길게 보전할 논을 산다고 했다. 즉 향교의 건물 수리와 하인의 밀린 급료로 방매한 자금의 일부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식리하여 수익을 낸다는 것이다.
식리를 통해 얻어지는 수익은 3~4년을 한계로 좋은 논 5~6섬[石]을 선택해서 사들이고, 그 후 식본한 것은 영원히 혁파한다고 했다. 향교의 기본 목적이 교육인만큼 재정 형편이 좋아지면 대민 피해를 증대시키는 고리대를 혁파한다는 의미로 보인다. 또한 향교에서 유용하는 것은 300냥으로 정하고, 모입(慕入)한 돈 49냥 5전과 보폐전(補弊錢) 50냥 및 식본전(植本錢) 200냥 등의 합계는 299냥 5전이다. 분향(焚香)에 쓰는 것은 72냥씩으로 정하고, 춘추 향사 때는 120냥으로 정하며, 삼려제(三厲祭) 때는 45냥씩으로 정한다고 하였다. 결국 현풍 향교는 1,300냥의 방매한 돈으로 향교 건물 중수와 임금으로 300냥을 쓰고, 1,000냥을 식리를 놓았다. 또한 향교에서 유용할 수 있는 금액은 300냥인데, 이것은 모입전, 보폐전, 식본전으로 충당하고, 이 금액으로 분향, 춘추 향사, 삼려제 등의 제례에 소용되는 237냥을 배정한 것으로 보인다.
6. 『사적록』은 1758년부터 1990년까지 현풍 향교 운영과 관련해서 작성된 각종 글과 문서 등을 엮어 놓은 것이다. 1759년 현풍 현감 김광태가 지은 「성묘 이건기(聖廟移建記)」를 비롯하여, 「대성전 중수 상량문」,「향교 중수기」등과 향교의 재정 운영에 관한 절목 2건, 「향교 동국 유림기」,「향교 창학기」,「향교 소학 강식기」가 있고, 「순상국(김상진) 교궁획부전식본기」,「열성조제면석계의」,「영조조태학통문」[갑오] 등이 있다. 1973년 이래로 향교의 보수, 단청, 비품 마련에 관해 연도순으로 공사비 내역과 물품 기증자를 명시하고, 당시의 전교, 장의도 기록하고 있어서 근래의 현풍 향교 관리 현황을 상세히 알 수 있다.
7. 『향안 설립 초 정규 등초』는 1621년의 향록 작성 당시에 제정된 규정과 계축년에 일부 고친 규정을 1786년에 등서(謄書)한 것으로 도동 서원에도 같은 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이 자료는 향약적인 요소를 전혀 가미하지 않은 대표적인 향규(鄕規)로 보이는데, 향안 등재와 향임(鄕任) 선출, 향임자의 직무와 제재, 원악 향리(元惡鄕吏) 규찰과 공부(貢賦), 요역(摇役) 부과, 향회(鄕會)에 관한 규정 등을 담고 있다.
8. 『완의』는 1847년에 현풍 향교에서 제정한 것으로서 향교의 교육 기능이 점차 어려워져서 별도로 육영재(育英齋)를 만들었으며, 육영재에서 거접하는 경우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절목을 제정한다고 하였다. 절목은 모두 17개 조로 되어 있는데, 주요한 몇가지만 보면 거접은 매년 3월 초1일로 하며, 거접을 하는 인원은 시(詩)에 능숙한 이로 15명을 뽑되 백일장(白日場)을 통해 뽑는다고 하였다. 또한 거접을 할 때는 훈장 이외의 타 향원(鄕員)에게 양식을 제공하지 말며, 거접의 재임은 적정 연령에 도달하지 않은 자는 후임자로 천거할 수 없고, 모임에 갈 때의 부조는 5관전(伍貫錢)으로 정하고, 문과(文科)나 생진(生進)의 부조금도 5관전(伍貫錢)으로 정하였다. 무과(武科) 출신의 부조금은 2관전(貳貫錢)으로 정하였다.
향중에서 긴급히 쓸 곳이 있어도 육영재의 재곡(財穀)을 쓰지 말 것이며, 재중의 전답에서 나오는 소출을 제때에 받지 않거나 거두지 않는 임원은 책임을 끝까지 묻고, 재곡의 숫자는 문서에 기입하고 관청에서 첩(牒)으로 확인 받도록 하였다. 아울러 임사가 재곡을 멋대로 쓰면 접중에서 문책한다고 명시하였다. 일반적으로 거접은 과거 준비를 위하여 일정 기간 합숙하며, 학문에 정진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초 문풍이 쇠잔되는 가운데 현풍 향교에서는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육영재를 운영하고, 그곳에서 거접을 통해 향내의 인사들이 과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도록 후원하면서 향내 문풍 진작을 선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의 향교 운영의 어려움을 반영하듯 훈장 이외의 음식 제공을 제한하고, 거접 유생들의 과거 응시 때의 부조금도 제한하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현풍 향교의 연혁과 인적 구성 및 재정 운영 실태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