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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00707
한자 許得良
영어공식명칭 Hur Deukryang
이칭/별칭 국필(國弼),상무헌(尙武軒)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97년 1월 20일연표보기 - 허득량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15년 - 허득량 김상용, 김상헌에게 수학함
활동 시기/일시 1620년 - 허득량 무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20년 - 허득량 오위도총부 도사 겸 훈련원 첨정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21년 - 허득량 부친상으로 시묘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허득량 훈련 부정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허득량 수문장 겸 금군 별장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허득량 진무 공신 절충장군 부호군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28년 - 허득량 상무헌 짓고 은거
활동 시기/일시 1633년 - 허득량 가선대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36년 12월 - 허득량 창의
활동 시기/일시 1637년 1월 3일 - 허득량 창의
몰년 시기/일시 1637년 1월 3일연표보기 - 허득량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96년 - 허득량 배향하기 위해 충열묘 세움
추모 시기/일시 1804년 - 허득량 배향하는 충열사를 이건하여 용강 서원으로 승원
추모 시기/일시 1812년 - 허득량 병조 판서 지의금부사 훈련원사로 증직
출생지 대구광역시 달서구 용산동
거주|이주지 대구광역시 달서구 용산동
수학지 서울특별시
묘소|단소 허득량 묘 - 대구광역시 달서구 본리동 학산
사당|배향지 용강 서원 - 대구광역시 달서구 이곡동
성격 무신
성별
본관 김해
대표 관직 부호군

[정의]

조선 후기 달성 출신의 무신.

[개설]

허득량(許得良)[1597~1637]은 와룡산 아래 선원리[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용산동]에 살았던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이 지역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달성군에 편입되었던 곳이다. 노론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었으나 무과로 전향하여 1620년(광해군 12) 급제하여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수문장 겸 금군 별장으로 공을 세워 진무공신에 녹훈되고, 절충장군 부호군에 올랐다. 대구의 본가로 귀향하여 지내던 중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창의하여 광주(廣州) 쌍령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국필(國弼), 호는 상무헌(尙武軒). 8대조 허창(許敞)은 가락군(駕洛君)에 봉군되었으며, 증조할아버지 허수연(許壽連)은 학행(學行)으로 참봉이 되었다. 할아버지 허승립(許承岦)은 임진왜란 당시의 공신으로서 직장(直長)을 역임하였으며, 아버지 허용로(許龍老)는 음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제수되었다. 어머니는 교리(校理) 정남확(鄭南確)의 딸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다. 부인은 참봉 박세범(朴世範)의 딸 증정부인(贈貞夫人)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다. 1632년(인조 10) 36세 때 아들 허성(許誠)을 낳았다.

[활동 사항]

허득량은 1620년(광해군 12) 무과에 급제하고, 오위도총 부도사 겸 훈련원 부정이 되었다. 이듬해인 1621년(광해군 13) 아버지 허용로가 사망하자 관직을 사직하고 삼년상을 치른 후 1623년(인조 1) 훈련원 부정으로 복직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수문장 겸 금군 별장으로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고, 절충장군에 올라 부호군이 되었다. 1628년(인조 6) 병으로 귀향하여 학문에 매진하다 1633년(인조 14) 가선대부에 가자되었다. 이후 1636년(인조 17)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제(從弟) 허복량(許復良)과 함께 민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병마절도사 민영(閔栐)의 진에 들어갔고, 광주 쌍령 전투에서 많은 적병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1637년 관에서 운구하여 대구 감물천(甘勿川) 저자터[시기(市基)] 뒤편 전기현(田圻峴) 간좌원(艮坐原)에서 장례를 치렀다.

[학문과 저술]

일찍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19세인 1615년(광해군 7) 상경하여 김상용·김상헌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혔다. 이때 윤황(尹煌), 이지항(李之恒) 등과 담론을 나누고, 서상이(徐祥履)와 한흥일(韓興一), 민광훈(閔光勳), 정태제(鄭泰齊) 등과 교유하며 강학하고 매일 주자(朱子)의 글과 『근사록(近思錄)』 등을 상세히 읽었다. 1618년(광해군 10) 제갈량(諸葛亮)의 팔진도(八陣圖)에 관한 시를 짓고 무과에 뜻을 품었으며, 1619년 충주를 지나다 임경업(林慶業)의 집에 수일간 머물며 병학(兵學)을 합변(合變)하는 방법을 논하였다. 1628년(인조 6) 병으로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상무헌(尙武軒)을 짓고 병서를 탐독하였다. 이때 야은(野隱) 송시영(宋時榮)의 글 가운데 ‘진충보절(盡忠報節)’ 네 자를 베껴서 작은 병풍을 만들어 ‘사자병(四字屛)’이라 하고 충군 애국의 의지를 표현하였다. 저서로 『상무헌 유고(尙武軒遺稿)』가 있다.

[묘소]

묘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본리동 학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96년(숙종 22) 후손들이 충렬묘(忠烈廟)[충렬사(忠烈祠)]를 짓고 추모하다 1804년(순조 4) 충렬사를 이건하면서 용강 서원(龍岡書院)으로 승원하였다. 일찍이 포증(褒贈)의 특전이 없음을 안타까워하여 정조 대 이래로 일도 사림이 공의로 감영에 누차 연명 상소를 올렸다. 이에 1806년(순조 6) 관찰사 김희순(金羲淳)이 조정에 계문하고, 1808년에는 이조 판서 김이도(金履度)가 포증의 명에 대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그 결과 1812년(순조 12) 병조 판서 지의금부사 훈련원사(兵曹判書知義禁府事訓鍊院事)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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