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7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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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都愼修 |
영어공식명칭 | Do Shin Su |
이칭/별칭 | 영숙(永叔),지암(止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후기 달성 출신의 문신.
[개설]
도신수(都愼修)[1598~1650]는 팔거현[현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 ]에서 태어나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과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수학하였다. 당쟁의 영향으로 주로 외직에 있었지만 백성들의 구휼과 교화 등에 힘써 백성들이 도신수의 공을 기려서 비석을 세우기도 하였고, 왕명으로 내구마(內廐馬)가 하사되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부임한 영해부의 관사에서 병으로 사망한 후 50여 년이 지난 1708년(숙종 34) 용호 서원(龍湖書院)에 추향되었다. 용호 서원은 1704년(숙종 30)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에 성주 도씨(星州都氏)세덕사로 건립되었고, 1708년 용호 서원으로 승원하였다.
[가계]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영숙(永叔), 호는 지암(止巖). 증조할아버지는 경상좌우후 도흠조(都欽祖)이며, 할아버지는 증한성 우윤 도원결(都元結)이다. 아버지는 무공랑(務功郞) 서재(鋤齋) 도여유(都汝兪)이며, 어머니는 증판결사 이우겸(李友謙)의 딸 여흥 이씨(驪興李氏)이다. 부인은 판관 이상백(李尙白)의 딸 숙인(淑人) 벽진 이씨(碧珍 李氏)이다. 동생은 죽헌(竹軒) 도신징(都愼徵)[1611~1678]이다.
[활동 사항]
도신수는 1619년(광해군 11) 경상 감사가 효우(孝友)로 조정에 천거하였으며,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7년(인조 5)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28년(인조 6) 성균관 학유, 학정을 거쳐 박사로 승진하였으며, 1630년(인조 8) 삼례도 찰방, 1632년(인조 10) 형조 좌랑, 1633년(인조 11) 호조 좌랑, 1634년(인조 12) 공청 도사(公淸都事)와 성균관 직강을 거쳐 함흥 판관으로 부임하였다. 1637년(인조 15) 함흥 판관으로 재임할 때 공무를 신속히 처리하고, 대기근이 발생하자 구휼에 힘써 선정을 베풀었다. 가을에 호조랑으로 체직할 때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서 도신수의 공을 기렸다. 1640년(인조 18) 서흥 부사를 거쳐 1643년(인조 21) 울산 부사 시절 향약 8조를 지어 주민의 교화와 풍속을 크게 진작하고 폐정을 혁파하였는데, 관찰사가 이를 조정에 보고하여 내구마를 하사받았다. 1648년(인조 26)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1650년(효종 1) 영해 부사로 부임하여 근무하던 중 병에 걸려 관사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1605년(선조 38) 서사원에게 『소학(小學)』을 배우고, 1609년(광해군 1) 정구의 문인이 되었다. 1611년(광해군 3) 「원조오잠(元朝五箴)」을 지었으며, 1612년(광해군 4) 서사원으로부터 역학(易學)을 배웠다. 1848년(헌종 14) 『지암 선생 문집 (止巖先生文集)』[6권 2책]이 간행되었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영오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08년 도성유(都聖兪), 도여유를 배향하는 용호 서원에 추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