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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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裵紳 |
영어공식명칭 | Bae Sin |
이칭/별칭 | 경여(景餘),낙천(洛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광우 |
[정의]
조선 전기 달성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경여(景餘), 호는 낙천(洛川). 증조할아버지는 중랑장(中郞將) 배중현(裵仲賢)이고, 할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 배환(裵紈)이다. 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배사종(裵嗣宗)이며, 어머니는 박동선(朴東善)의 딸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다. 부인은 밀양 손씨(密陽孫氏)이다. 배신의 5대조인 중랑장 배용신(裵用臣)이 현풍현에 정착하였다.
[활동 사항]
배신(裵紳)[1520~1573]은 7세에 김열(金挒), 8세에 엄한경(嚴漢卿)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어릴 때부터 기재(奇才)가 있었다. 하루는 거리에서 고을 수령이 부하들과 함께 잡인을 물리치면서 지나가는데, 모든 아이가 두려워서 숨었으나 배신만 홀로 팔짱을 단정히 끼고 서 있으므로 수령이 "이 아이는 틀림없이 훗날 대덕 군자(大德君子)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17세에 향시(鄕試)에 급제하였으며, 약관의 나이에 조식(曺植)과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3년(중종 38)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김범(金範)·이제신(李濟臣)과 더불어 성균관에서 서치(序齒), 즉 나이에 따라 유생들이 앉기를 의논하였다. 또한 이를 여러 상사(上舍)에서도 시행하려고 했는데,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이준경(李浚慶)과 사성(司成) 송세형(宋世珩)은 옳다고 생각하였으나,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성세창(成世昌)이 반대하여 시행되지 못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선비들이 예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관계로 배신의 생각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1552년(명종 7)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삼년상을 치렀다. 1561년(명종 16) 어머니의 명으로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해 급제하였으며, 1565년(명종 20) 남부 참봉(南部參奉)에 임명되었다. 이어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빙고 별좌(氷庫別座)를 지냈으며, 1572년(선조 4)에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어 생도들을 가르쳤다. 당시 재능 없는 사람들이 동몽교관을 맡아 문제가 생기자, 조정에서 특별히 명유(名儒)로 동몽교관을 임명하였는데, 배신과 조목(趙穆)이 천거되었던 것이다. 이때 배신에게 배우려는 생도들이 많아져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해 스승 조식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조식의 행적을 알려고 했다. 이에 조식의 제자 중 배신이 조정의 명을 받아 「남명 선생 행록(南冥先生行錄)」을 지어 올렸다. 1573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 현풍현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노수신(盧守愼)·허엽(許曄) 등이 만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으로 한양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2권 2책의 문집인 『낙천집(洛川集)』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1677년(숙종 3) 현풍현의 생원 곽수하(郭壽夏) 등이 상소하여 정구(鄭逑)·배신·박성제(朴惺躋)를 도동 서원(道東書院)[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배향해 달라고 청원하였으나, 예조(禮曹)에서는 정구의 배향만 허락하였다. 이에 현풍현 유생들이 도동 서원 곁에 별사(別祠)를 건립해 배신을 배향하였다. 별사는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집권기 때 훼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