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8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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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忠善 |
영어공식명칭 | Kim Chungseon |
이칭/별칭 | 사야가,선지,모하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정의]
조선 후기 달성에 정착한 사성 김해김씨 시조.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사성(賜姓)]. 자는 선지(善之), 호는 모하당(慕夏堂). 일본 이름은 사야가(沙也可)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사옥(沙鋈), 할아버지는 사옥국(沙沃國), 아버지는 사익(沙益)이다. 부인은 목사(牧使)를 지낸 장춘점(張春點)의 딸 인동 장씨(仁同張氏)이다.
[활동 사항]
김충선(金忠善)[1571~1642]은 원래 일본인으로 1571년[선조 4] 일본에서 출생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우선봉장(右先鋒將)으로 참전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풍속과 문물에 감화되어,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 박진(朴晉)에게 강화서(講和書)를 보낸 뒤, 병졸 3,000여 명과 함께 귀부(歸附)하였다. 이에 항왜(降倭)로서 1592년 9월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 휘하에서 활동하며, 동래(東萊)와 양산(梁山) 등지에서 군공을 세웠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593년 권율(權慄)과 한준겸(韓浚謙)의 청으로 ‘김충선’이라는 성씨와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이로써 김충선은 우리나라 사성 김해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또한 1598년[선조 31]에는 울산 증성(甑城)의 적들을 크게 격파하는 군공을 세웠다.
1600년[선조 33] 경상도 대구 도호부 우록동(友鹿洞)[지금의 대구광역시 가창면 우록리]에 정착하였으며, 이 해에 장춘점의 딸 인동 장씨와 혼인하였다. 1601년 우록동에 모하당(慕夏堂)을 세웠으며, 1602년에는 가훈(家訓)과 향약(鄕約) 15개조를 지었다. 1603년에는 잉방소(仍防所)를 올려 여진족 방비 대책을 개진하였으며, 스스로 국경 방어를 자원해 10년 간 요해지(要害地)를 수호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공을 인정받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른 뒤, 우록동으로 되돌아왔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부하를 이끌고 진압에 참여하였다. 이때 김충선은 김해에서 이괄의 부장(副將)인 서아지(徐牙之)를 참수하였는데, 서아지도 항왜장(降倭將) 출신이었다. 이괄의 난이 진압되자 공으로 사패지(賜牌地)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守禦廳)의 둔전(屯田)으로 쓰게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자진해서 참전하였다. 특히 병자호란 때는 광주(廣州) 쌍령(雙嶺)에서 청나라 군사를 물리쳤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1798년 간행된 3권 1책의 『모하당집(慕夏堂集)』이 전한다. 『모하당집』에는 김충선이 임진왜란·이괄의 난·병자호란 때 작성한 편지가 수록되어 있어, 이 시기 정세를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또한 「내외 자손 급 동리인 약조(內外子孫及同里人約條)」는 김충선이 우록동에서 자손·주민들과 함께 시행하려고 제정한 향약으로 우록동약(友鹿洞約)이라고도 한다.
[묘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삼정산(三頂山)에 묘소가 위치해 있다.
[상훈과 추모]
1789년[정조 13]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김충선을 배향하는 녹동 서원(鹿洞書院)이 건립되었다. 1892년[고종 29]에는 정헌대부 병조 판서(兵曹判書) 겸 지의금부훈련원사(知義禁府訓鍊院事)에 증직되었다. 일본에서는 1971년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쓴 『가도(街道)를 가다-한국 기행』으로 인해 주목 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김충선은 한 일 우호의 상징이 되었으며, 2012년에는 녹동 서원 옆에 달성 한일 우호관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