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865 |
---|---|
한자 | 孫處訥 |
영어공식명칭 | Son Cheonul |
이칭/별칭 | 기도,모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순한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도 대구 도호부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일직(一直). 자는 기도(幾道), 호는 모당(慕堂). 증조할어버지는 참봉(參奉) 손세경(孫世經), 할아버지는 현감 손치운(孫致雲)이다. 아버지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낸 손수(孫邃),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李氏) 이탄(李坦)의 딸이다. 처는 광주 이씨(廣州李氏) 이원경(李遠慶)의 딸과 창녕 조씨(昌寧曺氏)[하성 조씨(夏城曺氏)] 조응의(曺應義)의 딸이다. 손처눌의 조상은 안동 일직현에 거주하였는데, 그의 7대조인 손관(孫寬) 때 밀양으로, 증조할아버지 손세경이 대구 수성으로 이주하였다. 손세경의 입향 경위는 명확히 알수 없으나, 달성 서씨(達城徐氏) 서진원(徐震元)의 딸과 혼인하면서 처향을 따라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활동 사항]
손처눌(孫處訥)[1553~1634]은 대구부 수성리에서 태어났다. 1566년[명종 21]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에게 수학하고, 다음 해 향시에 합격했다. 1569년[선조 2] 광주 이씨 이원경의 딸과 혼인하였다. 1571년 장인의 장례식장에서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1573년 재차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예위(禮圍)에 낙방하면서 중앙의 정치와 현실 사회를 비판, 정계 진출을 포기하였다.
임진왜란 이 발발하자 아우 손처약과 정사철, 서사원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이용순(李用淳)에게 군무 7조(軍務七條)를 진달하고, 달성 부근에서 왜적을 대파하는 등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학자로 돌아와 학문에 정진하면서 황청동(黃靑洞)[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묘소 아래 영모당(永慕堂)을 지어 전쟁 중 돌아가신 부모님의 상례를 지냈다. 그러던 중 1602년[선조 35] 성주의 한강 정사(寒岡精舍)에 찾아가 정구를 만나면서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1611년[광해군 3]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배향을 배척한 정인홍(鄭仁弘)의 상소에 손인과 함께 「부정 척사 통문(扶正斥邪通文)」을 지어 도내 사림을 규합하였다. 1634년[인조 12] 영모당에서 82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황청동 선영에 장사를 지냈다.
[저술 및 작품]
시문집으로『모당집(慕堂集)』이 있다. 3권 2책의 목판본으로, 1784년[정조 8] 후손 양겸(養謙)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광정(李光靖)의 서문이 있다. 권1·2는 시(詩), 권3은 서(書)·잡저·잠·명·제문·축문·묘도문(墓道文)·행록과 부록으로 구성되었다.
[묘소]
손처눌의 묘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에 위치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대구광역시 수성구에 위치한 청호 서원(靑湖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