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8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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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龍魯 |
영어공식명칭 | Lee Yongro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전의(全義). 아버지는 이근영(李根泳)이다.
[활동 사항]
이용로(李龍魯)[1897~?]는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 하산동에서 태어났다. 일본 유학 중 도쿄[東京]에서 3·1 운동을 경험하였다. 그 직후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임시 정부 수립이 추진되었다. 임시 정부 수립에는 많은 자금이 필요하였다. 1919년 6월 동아 예비 학교(東亞豫備學校)에 재학 중이던 이용로는 경상남도 합천 출신의 장인환(張仁煥)과 함께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1917년 7월 15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리되어 석방되었다. 1920년 일본도쿄 중앙 대학 법학과에 재학 중 재일 조선인 학생 기독교 청년회 사건으로 대구 형무소에 약 7개월간 구속되었다. 이로 인해 동교 1학년 재학 중 중퇴하였다. 그 후 고향인 달성군 하빈면 하산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뒤인 1932년 중국에 들어가 북경(北京)한국 독립군 정보원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귀국하였고, 1948년 9월 22일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제정되어 공포됨에 따라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949년 2월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경상북도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장에 정운일, 위원에 송전도·방한상·이용로·정계환 등이 임명되었다. 이들 위원들은 일제 강점기 대구·달성 지역에서 민족 운동을 전개한 인물들이었다. 경상북도 특위는 대구 동성로에 위치한 대구 지방 법원 소년부 지원에 사무실을 열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영장이 발부된 것이 30건에, 18건이 조사 완료되었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반민 특위경상북도 조사관 활동에는 늦게 시작하였는데, 그가 조사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는 조선 은행 대구 지점 폭파 사건의 장진홍(張鎭弘)을 탄압하여 유명해진 경상북도의 거물급 친일 경찰 최석현(崔錫鉉), 양산 농민 조합 사건을 조사한 친일 경찰 장자관(張子寬), 독립운동가 유시태(柳時泰)를 일제 경찰에 밀고한 혐의의 이인희(李麟熙) 등이었다. 그러나 반민 특위의 본래 목적이 실현되기 전에 이승만 정부의 반민 특위 해산 조치로 말미암아 친일 반민족 행위자의 처벌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그 가운데 한국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대구·경상북도 지역에서 발생한 피학살자 사건의 희생자들을 발굴하고 가해자 처벌, 희생자의 명예 회복 및 보상을 위한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 결성에 참여하여, 부회장이 되었다. 당시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의 피학살지 발굴 장소는 달성군 가창을 비롯해 화원·월배 등이었고, 이 활동을 통해 한국 전쟁 전후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한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후 전국 피학살자 유족회의 결성을 추진하여 중앙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군사 혁명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15년형에 구형되었다가 무죄로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