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0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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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日 友好- 歷史 - 沙也加, 金忠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지국 |
[정의]
임진왜란 때의 귀화 장군인 김충선에 대한 한 일 양국 간의 인식 변화와 현대적 의미.
[개설]
김충선(金忠善)[1571~1642]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의 선봉이 되었다가 조선에 귀화하여 일본 공격에 앞장을 선 특이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항왜(降倭)[조선에 투항한 왜군]로서 공을 세워, 김해 김씨(金海金氏)와 충선(忠善)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성 김해김씨(賜姓金海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경상도 대구도호부 우록동(友鹿洞)[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정착하였으며, 이곳에서 가훈(家訓)과 향약(鄕約) 등을 만들어 시행하였다. 이괄(李适)[1587∼1624]의 난, 병자호란 등에서 공을 세웠으며, 저서로 『모하당집(慕夏堂集)』이 있다. 김충선은 조선 후기의 인물이나 현재까지 한 일 관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특히 김충선이 입향한 이래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는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거주하며 '가창면 우록 1리김해 김씨 집성촌'을 형성하였으며, 그 공간은 김충선의 추모와 한 일 문화 교류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김충선의 생애]
김충선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字)는 선지(善之), 호(號)는 모하당(慕夏堂)이다. 본래 일본인으로 성은 사(沙), 휘는 야가(也可)이다. 아버지는 사익(沙益), 할아버지는 사옥국(沙沃國), 증조할아버지는 사옥(沙鋈)이며, 부인은 목사(牧使)를 지낸 장춘점(張春點)의 딸 인동 장씨(仁同張氏)다.
1571년(선조 4) 1월 3일 일본에서 출생한 김충선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우선봉장(右先鋒將)으로 참전하였다. 1592년 4월 20일 절도사에게 보낸 「강화서(講和書)」에 따르면 임진왜란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나 조선에 오고 싶다는 생각으로 선봉이 되었고, 조선에 와서 그 풍속과 문물에 감화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에 김충선은 병졸 3,000여 명과 함께 귀부(歸附)[스스로 와서 복종함]하였다. 이후 항왜로서 1592년 9월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1547∼1615] 휘하에서 활동하며, 동래(東萊)와 양산(梁山) 등지에서 군공을 세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593년 권율(權慄)[1537∼1599]과 한준겸(韓浚謙)[1557~1627]의 청으로 김해 김씨와 충선이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받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김충선은 임진왜란이 치러지는 동안 조총·화포·화약의 제조법을 조선에 알려 주었고, 1597년 경상도 운봉 전투에서는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600년(선조 33) 경상도 대구도호부 우록동에 정착하고, 이 해에 인동 장씨와 혼인하였다. 1601년 우록동에 모하당을 세웠으며, 1602년에는 가훈과 향약 15개 조를 지었다. 1603년에는 잉방소(仍防所)를 올려 여진족 방비 대책을 개진하였으며, 스스로 국경 방어를 자원해 10년 간 요해지(要害地)를 수호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공을 인정받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른 뒤, 우록동으로 되돌아왔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부하를 이끌고 난을 진압하였다. 이때 김충선은 김해에서 이괄의 부장(副將)인 서아지(徐牙之)를 참수하였는데, 서아지도 항왜장(降倭將) 출신이었다. 이괄의 난이 진압되자 공으로 사패지(賜牌地)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守禦廳)의 둔전(屯田)으로 쓰게 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자진해서 참전하였다. 특히 병자호란 때에는 광주(廣州) 쌍령(雙嶺)에서 청나라 군사를 물리쳤다.
이러한 김충선의 공적이 인정되어 훈련도감에서 '그의 자손을 대대로 채용하고 조세나 부역을 면제하도록 해 달라'는 계를 올려 왕에게 윤허를 받았다. 22세 일본군 선봉장으로 조선에 귀부해 온 이후 66세에 이르기까지 많은 공적을 쌓은 김충선은 이후 우록동으로 돌아와 1642년 7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묘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녹동 서원(鹿洞書院) 뒷산에 위치해 있다. 1892년(고종 29)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 판서 겸 지의금부훈련원사(兵曹判書 兼 知義禁府訓鍊院事)에 증직되었다.
[조선 시대 김충선에 대한 인식]
김충선에 대한 조선 시대 인식은 『선조실록(宣祖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 관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선조실록』에는 '첨지 사야가'로, 『승정원일기』에는 '항왜장 김충선' 또는 '항왜영장(降倭領將) 김충선' 등으로 각각 표기하고,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에서 활약한 김충선의 공적을 기록하고 있다. 항왜로서 적극적으로 활약한 김충선에 대해 조선 정부 역시 강한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조정에서 내린 포상이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의 활약으로 가선대부와 자헌대부에 오르고, 성과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 후 정유재란과 북방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하여 방어에 힘쓴 공을 인정받아 정헌대부에 올랐다. 이괄의 난 때에는 사패지를 하사받았으나 고사한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 정부로부터 관직을 하사받은 김충선은 이후 향촌 지역 내에 일정한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 재지사족들은 자신들 주도의 향촌 지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향촌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중 하나가 서원(書院) 건립과 운영이다. 서원 건립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제향(祭享)의 대상, 즉 서원에 배향된 인물의 성격이다. 김충선은 국가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은 인물로 충분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1794년(정조 18) 김충선의 후손들과 대구를 비롯한 경상도 내 유림들은 녹동 서원을 건립하였다. 녹동 서원에서 그를 추모함과 동시에, 서원을 중심으로 향촌 사회 활동을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녹동 서원은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집권기 때 훼철되었으나, 1914년 중건되었다. 1972년 서원의 규모가 협소하다 하여 원래의 위치에서 100m 떨어진 현재의 위치[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길 218]로 이건해 증축되었다.
한편, 김충선의 후손 김한조(金漢祚)가 그의 글과 필적을 모아 1798년(정조 22) 『모하당집』을 간행하였다. 18세기 후반 영조·정조 시기,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운 인물을 현창(顯彰)하는 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김한조 등 김충선의 후손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따라 『모하당집』을 간행하여 김충선의 존재를 조정과 향촌 내에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42년(헌종 8) 개수본 발행 역시 동일한 의미로 이해된다.
『모하당집』 간행을 계기로 김충선의 이야기를 전하는 인물전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규상(李奎象)[1727~1799]이 쓴 『병세제언록(幷世諸彦錄)』을 보면 외국에서 조선에 들어와 살게 된 사람이나, 그 후손들에 대해 기록한 「우예록(寓裔錄)」과 「풍천록(風泉錄)」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우예록」에 김충선이 기술되어 있다. 이 밖에 김진항의 『미산 전집(麋山全集)』에 수록된 「김장군 충선록(金將軍忠善錄)」, 이의연의 『이재집(頤齋集)』에 수록된 「김충선전(金忠善傳)」, 성대중(成大中)의 『청성집(青城集)』, 성해응의 『연경재 전집(硏經齋全集)』에 실린 「김충선(金忠善), 귀영가(貴盈哥)」 등에서 김충선을 다루고 있다.
[개항기~일제 강점기 김충선에 대한 인식]
조선 시대에 이어 개항기~일제 강점기에도 김충선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었다. 1892년(고종 29)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300년이 되는 해로서 당시를 회고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에 김충선의 후손들과 지역 사림들은 증직을 하사하고 향례를 치르게 해 달라는 글을 조정에 올리게 되고, 1892년 김충선은 정헌대부 병조 판서 겸 지의금부훈련원사에 증직되었다. 이어 김충선의 후손들에 의해 1893년 『모하당 실기(慕夏堂實記)』가 간행되었다.
이 밖에 1897년(고종 34) 박의성(朴義成)이 편찬한 『기년 편고(紀年便攷)』를 비롯하여 박은식(朴殷植)의 시문집인 『겸곡 문고(謙谷文稿)』의 「김충선전(金忠善傳)」, 안종화(安鍾和)의 『국조 인물지(國朝人物志)』, 매일 신보 기자 송순기(宋淳夔)가 쓴 『기인 기사록(奇人奇事錄)』 등 김충선에 대한 작가들의 관심도 지속되었다. 하지만 『국조 인물지』와 『기인 기사록』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한편, 김충선에 대해 일본에서도 어느 정도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본격적인 관심과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이다. 김충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일본에 대한 반역자로 이해하는 등 당시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광복 이후 김충선에 대한 인식]
1965년 한일 협정이 타결되면서 새로운 한 일 관계가 구축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 김충선에 대한 재조명,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의 경우 1968년 방기환이 『왜장 사야가(倭將 沙也可)』를 발표하였고, 일본에서는 1964년 『동경 신문(東京新聞)』에 「한국에 귀화한 일본 무장의 자손[韓國に歸化した日本武將の子孫]」이라는 기사가 실리면서, 한 일 양국 간에 김충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김충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가 1971년 7월부터 1972년 1월까지 총 28회에 걸쳐 『주간 조일(週刊朝日)』에 연재한 「가도를 가다, 한국으로의 기행[街道を行く·韓のくに紀行]」 때문이었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왜관, 김해를 경유하는 가야 여행, 신라 여행, 백제 여행 순으로 전개되는 기행문에서 김충선은 신라 여행 편에 나타난다. 이 글을 통해 김충선은 일본에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게 되었고, 일제 강점기 부정적·회의적이던 평가가 전환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임진왜란 400주년을 맞이하여 1990년대 김충선에 대한 연구와 다양한 콘텐츠가 한 일 양국 간에 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1992년 녹동 서원 경내에 임진왜란 400주년 기념 신도비가 건립되었고, 1998년 녹동 서원 왼쪽으로 한 일 간의 교류 협력의 장인 충절관(忠節館)을 개관하였다. 같은 해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 김충선이 수록되었으며, 모하당사상연구회[2005년 김충선 연구회로 개칭]가 발족되어 김충선에 대한 학문적 연구 기반을 마련하면서, 2005년 『김충선(사야가) 한일 국제 SYMPOSIUM』, 2007년 『조선 통신사 400주년 기념 김충선(사야가) 한일 국제 SYMPOSIUM』 등의 국제 심포지엄과 “한일 손에 손잡고 콘서트” 등이 개최되기도 하였다. 2012년에는 녹동 서원 오른쪽에 한일 우호관이 개관되어 지역민들과 일본인 관광객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다양한 방송 콘텐츠도 제작되었다. 1999년 영남 일보에서 「한일 관계 새 지평 연 김충선」과 「한·일 ‘미래의 코드’ 김충선을 다시 본다」가 연재되었다. KBS 『역사 스페셜』에서는 2002년 「임진왜란 비사, 왜군과 싸운 왜군들」, 2010년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여 온 귀화 성씨」, 2012년 EBS 『역사 채널e』「영웅과 역적 사이」, 2015년 KBS 『역사 저널 그날』에서는 「풍전등화의 조선, ‘그들’이 있었다 -1편 항왜 왜장 사야가, 조선에 투항한 날」 등을 제작·방영하였다.
일본에서도 김충선을 주제로 한 소설과 방송 콘텐츠가 제작되었다. 1992년 NHK 『역사 발견(歷史發見)』 프로그램에서 「조선 출병 400년, 히데요시에게 반역한 일본 무장[朝鮮出兵400年 秀吉に反逆した日本武将]」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 또한 1993년에는 고사카지로[神坂次郞] 의 『바다의 가야금[海の伽倻琴]』, 1996년에는 하세가와 쓰토무[長谷川つとむ]의 『귀화한 침략병: 조선의 역이문[歸化した侵略兵: 朝鮮の役異聞]』, 2005년에는 에미야 타카유키[江宮隆之]의 『사야가 -의에 살았던 항왜 장수[沙也可―義に生きた降倭の将]』 등의 소설이 출판되었다. 이어 1999년에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김충선이 수록되기도 하였다. 이 밖에 김충선의 일본 출신지로 추정되는 곳 중 하나인 와카야마현에서는 2011년 기슈도쇼구[紀州東照宮] 경내에 사야가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김충선이 가지는 현대적 의미]
일본인으로 태어나 조선인으로 살아간 김충선은 활동 당시 조선 정부와 조선인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또한 그를 배향한 녹동 서원은 우록리를 중심으로 그의 후손들이 향촌 지배 질서를 유지하고, 향론을 형성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김충선은 광복 이후 새로운 한 일 관계가 모색되는 과정에서 재해석되었고, 재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양국에서 다양한 연구와 문화 콘텐츠들이 제작되면서 대중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이러한 점에서 한 일 양국의 평화적인 우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가교로서 김충선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와 역할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항왜라는 이유로 일본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최근에는 평화를 사랑한 평화주의자로 재평가되면서, 녹동 서원과 달성 한일 우호관을 방문하는 일본인들의 숫자가 늘고 있다. 따라서 김충선과 녹동 서원을 중심으로 한 우록리는 한 일 관계를 개선하고 우호의 역사를 쌓는 역사적 공간으로 활용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김충선이 지니는 역사적·문화적 의미에 비해 관련 연구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관련 사료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승정원일기』에 실린 단편적인 기사와 『모하당집』이 전부이며, 광복 이후 쌓인 연구와 방송 콘텐츠 등을 통해 당대 김충선에 대한 인식을 이해하는 정도다. 따라서 한 일 양국 학자와 연구회가 협력하여 김충선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를 지속하는 한편,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여 대중들의 관심을 더욱 높여야 한다.
더불어 김충선을 매개로 한 한 일 양국 간 민간 교류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이미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위치한 달성 한일 우호관과 일본 와카야마 현의 사야가 기념비 건립을 계기로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와카야마 현 간의 우호적인 기반이 조성되었다. 특히 김충선에 대한 양국 간의 관심으로 우록리는 한 일 우호의 공간이자, 한 일 문화 교류의 장으로 인식되어 지역민은 물론 일본인 관광객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지속시켜 한 일 양국의 자치 단체·연구회·시민 단체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교류를 통해, 한 일 우호 친선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매개체로서 김충선과 우록리를 활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