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5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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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雙溪里 金化寺 - |
이칭/별칭 | 쌍계리 금화사지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유적/터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유가북길 15-10[쌍계리 83]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박병선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쌍계리에 있던 통일 신라 시대의 절터.
[개설]
쌍계리 금화사(金化寺) 터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쌍계리 83번지대구 경북 과학 기술원 부지 내 축구장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통일 신라 시대의 절터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2004년에 달성군 유가면[현 유가읍] 쌍계리 일대가 대구 테크노폴리스 사업 부지 내 대구 경북 과학 기술원 입지로 선정되면서 2007년에 대구 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 조사를 하고, 2008~2009년에 걸쳐 한국 문화재 보호 재단에서 시굴 조사와 함께 일부 지역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청동기 시대의 집자리와 삼국 시대~통일 신라 시대로 추정되는 절터, 객사 관련 건물 터, 기와 가마, 고상 건물 터, 우물, 돌덧널무덤 등의 다양한 유구들이 확인되었다. 발굴 조사 후 금화사(金化寺) 터로 추정되는 일대가 축구장 부지로 조성되면서 현재 유구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대구 경북 과학 기술원 부지 내 축구장 일대가 금화사 터라고 단정하기는 무리지만 『영남 읍지(嶺南邑誌)』 현풍현(玄風縣) 불우조(佛宇條)에서 "금화사는 현풍현 동쪽 5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사되었다"고 하면서 "석탑의 돌이나 건물의 주춧돌은 인근의 향교나 서원 및 관사의 석재로 사용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금화사는 조선 시대 어느 시기까지는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현풍 향교(玄風鄕校)가 소실되자 현감 이영도(李詠道)가 구(舊) 교동에 중건하였고, 1759년(영조 35)에 현감 김광태(金光泰)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는데, 현풍 향교의 오래된 기와에 새겨진 연호는 고려 시대 중국의 연호였다. 당시 금화사의 주춧돌과 탑석, 목재, 기와 등을 사용하여 현풍 향교를 세운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현풍 향교가 금화사 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직선거리로 700m 정도에 불과하고, 향교의 외삼문(外三門) 좌측에는 석탑재와 석등 연화대 석편이 적재되어 있고, 서재(書齋) 앞쪽에는 상층 기단면석이 디딤돌로 이용되고 있다. 명륜당(明倫堂) 기단 석재로 탑신면석이 사용되었고, 대성전(大成殿) 기단 전면에는 연화문이 양각된 석탑재와 배례석이 놓여 있다. 이외에도 안상(眼象)이 새겨진 각종 탑재나 석등대석이 기단이나 주춧돌로 곳곳에 사용되고 있다.
발굴 조사 결과 통일 신라에서 조선 시대까지의 건물 터가 확인되었고, 『영남 읍지』의 기록과 현감 김광태의 현풍 향교 이건 사실 등을 종합하여 보면 적어도 조선 전기까지는 금화사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