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6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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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達城道東書院 |
영어공식명칭 | Dodongseowon Confucian Academy, Dalseong |
이칭/별칭 | 쌍계 서원,보로동 서원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구지서로 726[도동리 3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지국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는 김굉필을 기리기 위한 조선 후기의 서원.
[개설]
달성 도동서원(達城道東書院)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후에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를 종향(從享)하였다.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위치]
달성 도동서원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구지서로 726[도동리 35]에 있다. 구지면사무소[달성군 구지면 창리로11길 38구지 119 지역대] 정문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28m 직진한 후 좌회전하여 창리중앙2길을 따라 416m 간 뒤 우회전하여 약 7㎞ 이동하면 오른쪽에 달성 도동서원이 있다.
[변천]
달성 도동서원은 1568년(선조 1) 비슬산 기슭에 세워진 쌍계 서원(雙溪書院)에서 유래한다. 창건 시 문적(文籍)에 의하면 지역 유림과 지방관의 적극적인 협조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1573년(선조 6) 경상 감사의 장계(狀啓)에 의해 사액(賜額)과 서적을 하사받았다. 임진왜란으로 폐파(廢破)되어 10여 년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604년(선조 37) 현풍현(玄風縣) 오설리(烏舌里) 송림(松林) 보로동(甫老洞)으로 옮겨 다시 건립하여 이름을 ‘보로동 서원(甫老洞書院)’으로 고쳤다. 당시 서원 중건은 사림의 공론에 의해 김굉필의 내외손과 사림이 협력하여 이루어졌는데, 특히 김굉필이 외증손이며 영남학파를 영도한 정구가 실질적으로 관장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1678년(숙종 4) 정구 역시 서원에 종향되었다. 1610년(광해군 2) 도동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이후 도동서원은 지방 유림들을 결집하고 나아가 안동·경주·상주권 등 도내 유림 세력과 협조 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상도 중부 지역의 대표 수원(首院)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김굉필을 향사하는 대표 서원으로 흥선 대원군 집권기 때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하였다. 한편, 도동서원은 김굉필과 도의지교(道義之交)가 있던 현풍 출신의 곽승화(郭承華), 배신(裵紳), 곽율(郭𧺝), 원개(元槩) 등 4명을 배향하기 위해 원방(院傍)에 별사(別祠)를 건립하였다. 1695년(숙종 21) 곽승화·배신·곽율이 병향(竝享)되고,1706년(숙종 32) 원개를 추향하였다. 별사는 사액되지 못한 채 흥선 대원군 집권기 때 훼철되었다. 1720년(숙종 46) 묘우를 중수하였고, 1730년(영조 6) 서재를 중수하였으며, 1803년(순조 3) 묘우·강당·동재와 서재·신문(神門)·별묘(別廟) 등의 중수와 수리를 거쳐 1837년(헌종 3) 다시 묘우를 수리하였다.
[형태]
달성 도동서원은 대니산 서북 기슭 구릉에 있다. 경사 지형을 이용하여 앞쪽에 강학 공간, 뒤쪽에 제향 공간을 둔 전학 후묘(前學後廟)로 배치되었다. 건물들은 축을 중심으로 수월루(水月樓)·환주문(喚主門)·중정당(中正堂)·내삼문·사당이 차례로 배열되어 있는데,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서원 오른쪽에 장판각, 증반소(蒸飯所), 전사청(典祀廳), 곡간채, 문간채 등이 별도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수월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2층 구조로 누하에 출입문을 설치하고 누상에 계자 난간을 둘렀다. 환주문은 수월루를 지나 강학 공간으로 진입하는 문으로, 강학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에 중정당과 수월루와 함께 일직선상에 위치한다. 작은 일각문이지만 사모 지붕으로 옥개부를 강조하였다.
강당인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 협실형(中堂夾室型)이다.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동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왼쪽부터 2칸의 온돌방과 1칸의 마루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온돌방의 전면에 쪽마루를 달았다. 서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왼쪽으로부터 1칸의 마루방과 2칸의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재와 서재는 대칭으로 마주하여 위치한다. 내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집이고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장판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며, 중정당의 좌측 배면쪽 한 단 낮은 대지에 자리한다.
증반소는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대지 관계상 박공 부분에 출입문을 두었다. 전사청은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ㄷ'자형으로 본채의 중앙 3칸은 전면이 트인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좌우 칸은 전면으로 이어져 익사(翼舍)를 형성하고 있다. 우익사는 배면부터 2칸 부엌과 2칸 온돌방, 좌익사는 배면부터 1칸 온돌방, 1칸 부엌, 1칸 온돌방, 1칸 마루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곡간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는 통간으로 칸막이 없이 창고로 이용하고 있다. 문간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ㅡ'자형으로 왼쪽 첫 번째 칸은 현재 창고로 사용되고 있으나 원래는 외양간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두 번째 칸은 대문칸으로 전면 기둥에 판문이 설치되어 있다. 세 번째 칸은 디딜방아칸이었으나 현재는 전면부를 변형하고 문을 달아 가축을 키우고 있다. 마지막 칸은 화장실로 사용하고 있다.
[현황]
1963년 1월 21일 달성 도동서원 경내 강당과 사당 및 이에 딸린 담장이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었다. 2007년 10월 10일 서원 전면에 위치한 신도비, 은행나무 등을 포함한 서원 전역이 사적 제488호로 지정되어 보존·관리되었으며,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소장 전적의 경우 1969년 95종 529책이 조사되었으나, 현재는 『경현록(景賢錄)』·『사마 방목(司馬榜目)』·『전운 옥편(全韻玉篇)』·『어정 규장 전운(御定奎章全韻)』·『춘추(春秋)』·『오경 백편(五經百篇)』·『경현 속록 보유(景賢續錄補遺)』 등 7종 23책만 있다. 필사본과 고문서로 구성된 성채 고문서는 중건 초창기인 17세기 자료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18세기 이후의 것인데, 특히 20세기 이후의 경제 관계 자료가 많다. 모두 105종 215건이 남아 있다. 이 밖에 소장 유물로 조선 시대부터 대대로 전래되어 온 궤, 보, 상준(上尊), 용작(龍勺), 작(爵), 점(坫), 촛대, 희준(犧尊) 등 총 8종 30점의 제기(祭器)와 벽화 2점, 내사본(內賜本)을 담은 함 2개가 있다. 현재 달성 도동서원이 소유하여 달성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달성 도동서원은 이른바 동방 오현의 수현(首賢)으로 문묘에 배향된 김굉필을 향사하는 서원이다. 안동의 도산 서원(陶山書院)과 병산 서원(屛山書院), 경주의 옥산 서원(玉山書院), 상주의 도남 서원(道南書院) 등과 경상도 중부권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흥선 대원군 집권기 서원 첼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함으로써 여타의 서원에 비해 비교적 많은 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건축학적으로 조선 시대 서원 건축의 가장 규범적이고 전형적인 형태로 평가되어 강당·사당과 이에 딸린 담장은 보물로, 서원 전역을 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