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745 |
---|---|
한자 | 朴彭年 |
영어공식명칭 | Park Paengnyeon |
이칭/별칭 | 인수(仁叟),취금헌(醉琴軒),충정공(忠正公),집대성(集大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수환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육신사에 배향된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 증조할아버지는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낸 박원상(朴元象)이고, 증조할머니는 판밀직부사(判密直副使) 홍언유(洪彦猷)의 딸 남양 홍씨(南陽洪氏)이다. 할아버지는 목사를 지낸 박안생(朴安生)이며, 할머니는 한성부 윤(漢城府尹) 김휴(金休)의 딸 정부인(貞夫人)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다. 아버지는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이고, 어머니는 총제(摠制)를 지낸 김익생(金益生)의 딸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안동 김씨이다. 부인은 관찰사를 지낸 김미(金彌)의 딸 천안 김씨(天安金氏)이다. 박팽년의 후손들이 현재 달성군 하빈면 묘리 묘골에 세거하고 있다.
[활동 사항]
박팽년(朴彭年)[1417~1456]은 1417년(태종 17) 충청도 회덕현(懷德縣) 흥농촌(興農村)[현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서 출생하였다. 1432년(세종 14) 생원시, 1434년(세종 16)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였으며, 1438년(세종 20)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1447년(세종 29)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였고, 세종 연간 집현전(集賢殿)의 정자(正字)·부수찬(副修撰)·부교리(副校理)·교리(校理)·직집현전(直集賢殿)·직제학(直提學)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당시 집현전의 젊고 유망한 학자들 가운데 학문이 가장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 불렸다.
1450년(문종 즉위) 보덕(輔德), 1451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1452년(단종 즉위) 집현전 부제학, 1453년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승정원 우승지(承政院右承旨), 1454년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형조 참판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455년(단종 3)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이 해에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내치고 왕위를 찬탈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투신하려 했으나 훗날을 도모하자는 성삼문(成三問)의 만류로 그만 두었다.
세조 즉위 후 내직으로 돌아온 박팽년은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1456년(세조 2) 형조 참판·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 단종 복위를 도모하던 박팽년은 성삼문·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과 은밀히 모의하여, 1456년 6월 1일 창덕궁(昌德宮)에서 거사하기로 하였다. 이날은 세조가 상왕(上王)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대접하는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연회 때 호위 무사인 별운검(別雲劒)으로 임명된 성승(成勝)과 유응부가 세조를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별운검 설치가 취소되면서, 함께 도모한 김질(金礩)이 거사 실패를 예상하고 박팽년 등을 고변하였다.
김질의 고변으로 박팽년 등은 체포되었는데,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아껴 회유하려 하였으나 박팽년이 자신은 단종의 신하이지 세조의 신하가 아니라며 단호히 거절하였다. 또한 충청도 관찰사 시절 세조에게 자신을 칭하는 글자에 ‘신(臣)’ 자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관직과 이름만 사용했음을 밝히어 세조가 크게 격노하였다. 결국 모진 고문 끝에 박팽년은 옥사하고 가족 또한 참화를 당했다. 아버지 박중림은 환열형(轘裂刑)에 처해졌고, 동생 박인년(朴引年)·박기년(朴耆年)·박대년(朴大年)·박영년(朴永年)과 아들 박헌(朴憲)·박순(朴珣)·박분(朴奮)이 모두 처형되었으며, 집안의 여성들은 관비(官婢)가 되었다. 다행히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星州李氏)가 임신 중이었는데, 그 소생을 친정에서 출산하였다. 그렇게 유복자로 태어난 이가 박일산(朴一珊)으로 성주 이씨의 친정이 있던, 경상도 대구도호부 하빈현(河濱縣) 묘골[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정착하였다.
[학문과 저술]
집현전 학자로 활동하면서 여러 학자와 함께 많은 관찬서(官撰書)를 저술하였으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삼대가 처형되면서 개인 문적은 전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글씨로 쓰여진 『취금헌 천자문(醉琴軒千字文)』이 전한다.
[묘소]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과 함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묘소가 있으며, 현재 이곳은 사육신 역사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3대가 화를 입었고 역적죄로 처형된 관계로 묘의 조성 경위는 알 수 없다. 다만 예전부터 박씨지묘(朴氏之墓)라는 표석(表石)이 새겨진 묘가 노량진에 있었고, 이것이 지금의 박팽년 묘소가 된 것이다.
[상훈과 추모]
생육신(生六臣) 중 한 명인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박팽년의 충절을 추모하였다. 이후 박팽년·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는 사육신(死六臣)으로 추앙받게 된다. 박팽년은 1691년(숙종 17) 복관(復官)되었으며, 1758년(영조 34) 이조 판서에 증직됨과 더불어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775년(영조 51) 단종의 무덤인 장릉(莊陵)의 충신단(忠臣壇)에 배식(配食)되었다.
박팽년의 고향인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는 송시열(宋時烈)이 쓴 '박팽년 선생 유허비(朴彭年先生遺墟碑)'[대전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8호]가 있다. 또한 박팽년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창절 서원(彰節書院),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민절 서원(愍節書院),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노은 서원(魯恩書院),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충곡 서원(忠谷書院),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죽림리 겸천 서원(謙川書院)에 배향되었다.
박팽년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는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는 사육신을 배향한 육신사(六臣祠)가 건립되어 있다. 육신사는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집권기 때 훼철된 하빈사(河濱祠)를 대신하여 1974년 새로 건립된 사당이다. 또한 묘리에는 1679년(숙종 5) 건립된 낙빈 서원(洛濱書院)이 있다. 낙빈 서원도 사육신을 배향한 서원으로 1694년(숙종 20) 사액(賜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