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14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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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養直集 |
이칭/별칭 | 『양직 문집(養直文集)』,『양직 선생 문집(養直先生文集)』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보라 |
[정의]
조선 후기 달성 출신의 학자 도성유의 시문집.
[저자]
도성유(都聖兪)[1571~1649]는 성리학자로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정언(廷彦), 호는 양직당(養直堂)이다. 도여유와 함께 달성 십현(達城十賢)으로 꼽히고 있다. 할아버지는 경상좌상좌우후 도흠조(都欽祖)이며, 아버지는 한성부 윤 도원결(都元結)이다. 도성유는 어릴 때 권응인(權應仁)에게 배우고 정구(鄭逑)와 서사원(徐思遠) 두 선생에게서 수학하여, 문장과 행실이 당대에 출중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서사원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군량을 조달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자 상경하여 손처눌(孫處訥) 등과 이언적·이황의 무죄를 변호하였다. 그 해 8월 오현(五賢)의 문묘 종사 때에 신판(神判)의 글씨를 썼다. 도성유는 예서에 능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하여 세상을 등지고 지내다가 일생을 마쳤다.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에 있는 용호 서원(龍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술로는 『성리정학집(性理正學集)』, 「체용각분도(體用各分圖)」, 「오경체용합일도(五經體用合一圖)」, 『양직집(養直集)』 등이 있다.
[편찬/간행 경위]
『양직집』은 1851년(철종 2) 후손들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고, 1961년에 중간되었다. 권두에 이원조(李元祚)의 서문이 실려 있다. 『양직 문집(養直文集)』, 『양직 선생 문집(養直先生文集)』이라고도 불린다.
[형태/서지]
목활자본 3권 1책으로 되어 있다. 판식은 사주 단변(四周單邊)으로 계선(界線)이 있으며, 상이엽 화문 어미(上二葉花紋魚尾)이다. 크기는 세로 31.7㎝, 가로 22.5㎝이며, 반곽은 세로 19.1㎝, 가로 15.2㎝이다. 1면 10행에 1행의 자수는 22자이다. 국립 중앙 도서관과 달성의 인수 문고(仁樹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권1에 시(詩) 70수, 권2에 부(賦) 3편, 서(書) 23편, 제문(祭文) 3편, 고유문(告由文) 4편, 오경도(五經圖) 1편이 있으며, 권3은 부록을 수록하고 있다. 시 가운데 「징심대(澄心臺)」는 경관이 뛰어난 징심대에는 선현의 공부하던 발자취가 서려 있는데 수양이 부족한 자신의 생애가 부끄럽다고 한탄한 내용이다. 부(賦) 중 「복초부(復初賦)」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다 착한 본성이 있지만 물욕에 눈이 어두워 타고난 아름답고 착한 본성을 버리고 오욕과 칠정에 사로잡혀 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고 하면서, 그 본성을 회복하여 진실한 생활을 영위하여야만 된다고 강조하였다.
서 중 「상한강정선생(上寒岡鄭先生)」은 정구(鄭逑)에게 보낸 글로, 노력하는 만큼 학문에 진전이 없음을 한탄하고 앞날의 공부에 지남(指南)이 될 비결을 가르쳐줄 것을 요청한 내용이다. 「답우복정경세서(答愚伏鄭經世書)」는 정경세에게 답한 것으로, 학문에 있어서 도움을 준 것에 대하여 고마움을 표시하며, 앞으로도 더욱 공부에 힘을 기울일 것을 바란다고 벗으로서의 정의(情意)를 나타낸 글이다. 이밖에도 「제정한강선생문(祭鄭寒岡先生文)」에서는 스승의 학문과 국가에 대한 공로를 열거하고 자기에게 베푼 은혜와 스승을 잃은 슬픈 심리를 술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