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14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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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禮谷集[郭𧺝] |
이칭/별칭 | 『예곡 문집(禮谷文集)』,『예곡 선생 문집(禮谷先生文集)』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창근 |
[정의]
조선 전기 달성 출신의 의병장 곽율의 시문집.
[저자]
곽율(郭𧺝)[1531~1593]의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태정(泰靜), 호는 예곡(禮谷)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의병이다. 아버지는 참봉 곽지인(郭之仁)으로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곽율은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72년(선조 5) 성균관의 천거로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노모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원하여 김천 찰방(金泉察訪)으로 전직되었다가, 내섬시 직장(內贍寺直長)·송라 찰방(松羅察訪)을 역임하고 1585년 학행으로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특진되었다. 이어 홍산 현감(鴻山縣監)·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거쳐 예천 군수로 있던 중 파직당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 의해 초계군(草溪郡)의 임시 수령으로 기용되어 왜군과 싸웠으며 곧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으로 전직 명령이 내렸으나, 유생 정유명(鄭惟明) 등의 유임 상소에 의해 초계 군수로 유임되어 강우(江右) 지역의 보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학문을 즐겼고 사람됨이 순정하여 가는 곳마다 학풍을 일으켰으며, 찰방으로 있을 때에는 풍속을 순화하였다.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의 도동 서원(道東書院) 별사에 제향되었다. 이 별사는 흥선 대원군 집권기 때 훼철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예곡집(禮谷集)』[곽율] 은 1800년(정조 24) 후손 곽진규(郭鎭奎)가 자신의 조상인 곽율의 시문을 모아 편집하여 간행한 것이다. 권두에 정종로(鄭宗魯)·이가환(李家煥)의 서문과 세계도가 있고, 권말에 이원조(李源祚)의 발문 및 유묵이 있다. 『예곡 문집(禮谷文集)』, 『예곡 선생 문집(禮谷先生文集)』이라고도 불린다.
[형태/서지]
목판본 2권 1책으로 되어 있다. 판식은 사주 단변(四周單邊)으로 계선(界線)이 있으며, 내향 이엽 화문 어미(內向二葉花紋魚尾)이다. 크기는 세로 31.9㎝, 가로 20.5㎝이며, 반곽은 세로 20.9㎝, 가로 16.4㎝이다. 1면 10행에 1행의 자수는 20자이다. 국립 중앙 도서관과 계명 대학교 동산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권상(上)은 시(詩) 1수, 서(書) 8편, 유문(諭文) 2편, 발(跋) 1편, 잡저(雜著) 2편, 권하(下)는 부록으로 만사(輓詞)·제문(祭文)·행장(行狀)·묘지명(墓誌銘)·묘갈병(墓碣銘)·봉안문(奉安文)·축문(祝文) 각 1편, 증여시(贈與詩) 2수, 서(書) 3편, 보유(補遺)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문(遺文)에는 곽율이 임진왜란 당시에 초계군(草溪郡) 관장(官長)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변덕수(卞德壽)가 곽재우(郭再祐)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대기(李大期)·전치원(全致遠) 두 관내 의병장에게 변덕수를 설득하라는 내용의 「여초계내외면의장설학이대기탁계전치원(與草溪內外面義將雪壑李大期濯溪全致遠)」있다. 또한 「대초유사유현풍임사제인(代招諭使諭玄風任司諸人)」은 초유사를 대신하여 현풍(玄風)의 유지들에게 국난에 적극 대처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의의와 평가]
곽율이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인 만큼 임진왜란에 대한 내용이 있다. 「여초계내외면의장설학이대기탁계전치원」, 「대초유사유현풍임사제인」, 서(書)의 「여초유사성일김학봉(與招諭使誠一金鶴峯)」과 잡저의 「팔계 일기(八溪日記)」,「견문록(見聞錄)」 등은 임진왜란 당시의 영남 지방의 모습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