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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00015
한자 佛敎
영어공식명칭 Buddhism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집필자 엄진성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활동하는 석가모니를 교조로 하는 종교.

[개설]

불교는 석가모니를 교조로 삼고, 그가 설(說)한 교법(敎法)을 종지(宗旨)로 하는 종교이다.

[불교의 변천]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삼국 시대인 4세기 후반이다. 불교는 고구려 372년(소수림왕 2), 백제 384년(침류왕 1), 신라 527년(법흥왕 14) 순으로 공인되었다. 불교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 한반도에 들어왔는데, 한국의 문화 및 지역적 특성과 결합하면서 한국 불교의 독특한 성격을 형성해 왔다. 삼국 시대 불교의 전래는 한국이 중국 문화와 인도 문화의 영향을 동시에 받으며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는 중국의 정신문화를 대표하는 유교, 도교와 함께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한국의 역사와 종교, 문화를 형성해 왔다.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불교와 관련된 중심지는 비슬산(琵瑟山)이다. 비슬산은 유가종(瑜伽宗)의 본산이라고 여겨지는 유가사(瑜伽寺), 용연사(龍淵寺), 소재사(消災寺) 등의 사찰과, 『삼국유사(三國遺事)』 피은(避隱) 편의 포산 이성(包山二聖) 조의 무대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비슬산은 신라 시대부터 포산(包山)이라 하여 불교의 성산으로 유명하였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의 관기(觀機)도성(道成)이라는 두 성사(聖師)가 포산에서 함께 수도하여 각각 성불하였다는 이야기인 피은 편 포산 이성 조의 무대가 포산, 즉 비슬산이다. 비슬산에는 유가사의 부속 암자인 도성암(道成庵)이 정상 부근에 있다. 이곳은 선산의 도리사(桃李寺), 팔공산(八公山) 성전암(聖殿庵)과 함께 좋은 입지를 가진 곳이다. 관기도성은 혜공왕대 인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 비슬산과 관련해서 천태 신앙의 흔적도 확인된다. 고려 시대 비슬산 지역의 불교 신앙은 다양한 불교 신앙이 병존했던 성지로서 아미타 신앙, 화엄종, 천태종 등 다양한 신앙 형태가 존재했던 곳이다. 조선 시대 비슬산 지역의 불교 신앙을 말해 주는 자료로서 관음 신앙이 주목된다. 태종 때에 현풍현대견사(大見寺)의 관음이 땀을 흘렸으며, 세종 때에는 비슬산대견사의 석상 장육 관음에서 땀이 흘렀다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포산에서는 아미타 신앙과 더불어 관음 신앙도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달성 지역의 불교와 비슬산]

1. 비슬산일연(一然)

비슬산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대표적인 승려로는 일연이 있다. 일연비슬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려 1227년(고종 14)의 일이다. 승과에 급제한 일연비슬산 보당암(寶幢庵)에 머무르면서 마음을 선관(禪觀)에 두었다고 한다. 일연은 1236년(고종 23) 몽고 침략의 상황에서 화엄 사상은 물론, 선관을 익히고자 하였으며, 엄격한 수행에 의해 정토 신앙을 추구하였다. 무주암(無住庵), 묘문암(妙門庵) 등에 머물던 일연은 1249년(고종 36) 재상 정안의 초청으로 남해의 정림사(定林寺)로 떠날 때까지 비슬산에 머물렀다.

2. 비슬산과 유가종

유가종은 유식 사상을 중심으로한 학파로서 여기에 속한 사람들을 ‘유가사(瑜伽師)’라고 불렀다. 이들은 유식론을 바탕으로 존재의 공성(空性)보다도 현상을 세밀히 분석하여 설명하기 때문에 법상종이라 칭해지기도 한다. 유가 사상이 신라에 전해지는 것은 선덕 여왕(善德女王)[?~647] 이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선덕 여왕 때부터 많은 인재들이 중국에 유학하여 유가와 화엄 및 계율 등에 관하여 연구하였는데, 이들이 귀국하여 후학들을 지도할 때에 당시의 유학(幼學)들이 다투어 이들 교학에 관하여 학습함에 있어, 특히 화엄과 상응(相應)의 두 종(宗)이 융성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상응이란 바로 유가행을 가리키므로 이미 이 무렵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이에 관한 수행법이 유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즉 유가행에 관한 전적인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이 처음 당나라에 소개된 것은 현장이 인도에서 돌아온 3년 뒤인 648년인데, 이로부터 얼마 후에 우리나라가 중국에 이를 요청하여 보내 주기를 바라니, 이 논전이 우리나라에 보내져서 점차로 이 땅에서 유가행을 배우는 풍습이 성행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유가종을 배경으로 건립된 것이 비슬산유가사이다. 1424년(세종 6) 모든 종파가 폐합되어 선종과 교종으로 축소되었을 때 유가종, 즉 자은종(慈恩宗)은 교종 속에 들어가 그 이름을 잃고 말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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