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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00046
한자 十二旌閭閣- 玄風郭氏- 孝行- 烈行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지동길 3[지리 1348-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하창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풍곽씨십이정려각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지동길 3[지리 1348-2]지도보기

[정의]

현풍곽씨십이정려각에 모셔진 15명의 행적과 그 의미.

[달성의 전통과 십이정려각]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의 입구에 들어가면 “충효세업(忠孝世業) 청백가성(淸白家聲)”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그것은 “충성과 효심은 대대로 물려받은 살림살이이고, 청렴과 결백은 집안을 드날린 명성이라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글귀를 마을 앞에 당당히 내세우는 데는 모두 그럴 만한 역사적 근거가 있기 때문일 터인데, 그 대표격인 것이 솔례(率禮)라고 불리는 달성군 현풍읍 대리의 현풍곽씨(玄風郭氏) 십이정려각(十二旌閭閣)이다.

현풍곽씨십이정려각에는 충신 한 분과 효자 여덟 분, 그리고 열녀 여섯 분, 모두 열다섯 분이 모셔져 있다. 한 마을에 충신 하나, 효자 하나 나기도 어려운 일일진데, 여기에 한 가지 더하여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사람들이 모두 한 집안, 즉 현풍 곽씨의 집안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흔히 삼강(三綱)이라 불리는 충효열(忠孝烈)은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뿐인 목숨으로 값하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에 나라에서는 충신, 효자, 열녀가 있는 동네 어귀에 정문(旌門)을 세워 이를 본받고 기리도록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충성과 효심이 가히 대대로 물려받은 살림살이라고 하는 것이 결코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이제 십이정려각에 모셔진 한 분 한 분의 행적을 더듬어가면서 그들이 어떤 삶을 남기고 갔는지 그 효행과 열행을 하나 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십이정려각의 사연과 사람들]

1. 곽준의 '여기가 바로 내가 죽을 땅이다'

십이정려각에서 맨 앞에 모셔진 분은 존재(存齋) 곽준(郭䞭)[1551~1597]이다. 그는 18세 때 회시(會試)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고 난 뒤부터는 오로지 타고난 인간의 본성인 인의(仁義)를 함양하는 성리(性理)의 학문에 몰두했다. 하지만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송암(松岩) 김면(金沔)의 휘하에 들어가 왜군과 혈전을 치렀다. 곽준은 독전(督戰)하러 온 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이 그의 집안에 양식을 실어다 줄 정도로 전쟁에 전념했다. 곽준임진왜란에 보여준 이러한 분전(奮戰)이 인정되어 1594년 안음(安陰), 즉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의 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현감이 되고서도 조금의 여유도 가질 수 없었다.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과 황폐해진 농토를 보살피고 복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곽준은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들었다. 그것은 임진왜란에서 전황의 불리함을 느끼고 화의를 청해온 왜적이 돌연 태도를 바꾸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 전쟁에서 곽준은 안음 현감으로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켰다. 당시 그의 상관이었던 백사림(白士霖)은 산성을 둘로 나누어 험준한 북쪽은 자신이 지키고, 평지에 가까운 남쪽은 곽준이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자 왜적들은 당연히 험준한 북쪽을 버리고 평지나 다름없는 남쪽부터 침공해 들어왔다. 왜군은 군사의 수와 무기에 있어 아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곽준은 전투가 시작되자 침공해 오는 왜군을 향해 연이어 화살을 날려 쓰러뜨렸다. 이에 기세가 오른 아군은 용감하게 왜군과 맞서 싸워 물리쳤다.

하지만 아군은 그날 밤 물러났던 왜군들의 돌연한 기습에 무너지고 말았다. 산성의 북쪽을 방어하고 있던 백사림이 왜군의 수가 많은 것을 보고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자 그 빈 곳을 통해 다시 쳐들어온 것이었다. 적군의 수가 많은데다 기습적인 공격이어서 곽준의 군대로서는 막아낼 수 없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지자 곽준과 함께 싸우던 두 아들 곽이상(郭履常)과 곽이후(郭履厚)는 서둘러 피신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곽준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가 바로 내가 죽을 땅이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굳은 결의를 알고 자신들도 왜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이미 전세는 돌이킬 수 없었다. 급기야 왜군들이 지근에까지 쳐들어오자 두 아들은 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러자 곽준은 두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직책이 있으니 이곳을 죽음으로라도 지켜야 한다. 하지만 너희들은 그렇지 않으니 피신하도록 해라.”

하지만 두 아들 또한 아버지의 마음만큼이나 굳건하고 지극했다.

“아버지께서 나라를 위해 죽으려 하시는데, 자식이 아버지를 위해 죽으려는 것은 어찌 아니 되겠습니까.”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했던가. 그들은 왜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 황석산성의 전투에서 곽씨 집안은 부자가 모두 순국하는 비극을 당했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죽은 두 아들 중 맏이인 곽이상의 처 거창 신씨(居昌愼氏)가 지아비의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거기에다 곽준의 딸로 유문호(柳文虎)에게 시집을 간 현풍곽씨는 친정의 비보를 들은 데다 전쟁에 나간 남편마저 전사하자 통곡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전사하셔도 죽지 못한 것은 남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남편마저 전사했으니 어찌 차마 살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이렇게 한 집안에서 다섯 사람이 연이어 순사(殉死)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졌다. 그러자 선조 대왕께서 일문 삼강(一門三綱), 즉 한 집안에서 세 가지 근본 윤리를 바로 세웠다는 말씀과 함께 정려를 내려 그들의 행적을 만천하에 나타내도록 했다. 이리하여 한 사람의 충신과 그 충신인 아버지를 지키려했던 두 효자, 그리고 지아비의 뒤를 따른 두 열녀의 정려가 세워졌다.

뒷날 후손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은 그들의 행적을 이렇게 찬술하였다.

부충자효(父忠子孝)[아버지는 충성하고, 아들은 효도하니]

여부순렬(女婦殉烈)[딸과 지어미 죽음으로 열행을 보이네.]

일문삼강(一門三綱)[한 집안이 세운 세 가지 근본 윤리]

휘영일월(輝暎日月)[해와 달 같이 빛나도다.]

2. 왜군마저 감동시킨 효성

왜군의 침략으로 참화를 당한 것이 단지 곽준의 집안만이 아니었다. 현풍의 또 다른 곽씨 집안의 사람인 곽재훈(郭再勳)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불행이 들이닥쳤다. 그는 맏이인 곽결(郭潔)을 비롯한 곽청(郭淸)·곽형(郭泂)·곽호(郭浩)라는 네 아들을 두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네 아들은 아버지를 모시고 마을의 동쪽에 있는 유가산의 동굴 속으로 피난을 갔다. 그런데 왜군들이 그 동굴 앞을 지날 때 아버지가 갑자기 심한 기침을 하여 발각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맏이인 곽결이 마치 자기가 기침을 한 것처럼 하며 동굴 밖으로 나가 나머지 사람들을 구했다. 하지만 한번 터진 아버지의 기침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둘째인 곽청이 맏이와 같은 행동을 하며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렇게 해서 차례로 네 아들 모두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왜군의 칼날을 스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네 아들이 모두 죽고도 아버지의 기침이 멎지 않았다. 의아하게 여긴 왜군들이 동굴 속에 혼자 남은 아버지를 보고서야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비록 적이기는 하나 왜군들도 아버지를 구하려는 네 아들의 효성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를 풀어주며 그 등에 '사효자지부(四孝子之父)'라는 다섯 글자의 패를 달아 주어 더 이상 해를 입지 않도록 해주었다.

전쟁이 끝나고 이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나라에서는 정문(旌門)을 내려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하고, 마을 사람들은 유가산의 그 동굴에 '사효굴(四孝窟)'이라는 글자를 새겨 네 형제의 효행을 길이 전하고자 했다. 면우 곽종석은 네 형제의 효성을 이렇게 찬술했다.

유산유암(瑜山有巖)[유가산 높은 바위에]

유각황황(有刻煌煌)[빛나도록 새긴 글자 있다네.]

수기위효(誰其爲孝)[누가 그런 효도했던가,]

곽씨사랑(郭氏四郞)[곽씨 집안의 네 형제라네.]

담소취섬(談笑就殲)[웃으며 죽음으로 나아가니,]

부혜무양(父兮無恙)[아버지 아무 탈이 없으셨네.]

연생득인(捐生得仁)[목숨 던져 인을 얻으니,]

이류지앙(異類知仰)[오랑캐도 우러를 줄 알았네.]

3. 곽의창과 곽유창 형제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현풍에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선함을 증명하는 충효열의 행동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한 일들은 하나의 풍속이 되어 현풍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실천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예가 곽의창(郭宜昌)과 곽유창(郭愈昌) 형제의 효행이다. 곽의창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효성을 보였다. 그가 아이였을 때 어머니가 안아주면 울고, 여종이 안아주면 울음을 그쳤다. 어른들은 이것을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힘들지 않게 하려는 마음이라고 이해하였다. 이것은 어찌 보면 어른들의 지나친 해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이후의 행동들이 바로 그렇게 이해하도록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곽의창은 부모님이 병들어 누워 있으면 밥을 먹지 않았다. 부모님께서 걱정스러워 까닭을 물으면 이렇게 대답했다.

“부모님께서 식사를 하시면 저도 먹겠습니다.”

곽의창이 다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병이 들어 눕자 밤낮으로 그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하였다. 어느 날 한 손님이 아버지를 문병하러 오자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형제는 항상 아버님을 곁에서 모시고 있어 병환의 차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옵니다. 어르신께서 보시고 어떤지 좀 가르쳐주십시오.”

손님은 비록 어린아이의 말이었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는 지극한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아버지 또한 아들의 말에 가슴이 뭉클하여 이렇게 말했다.

“너는 어린애가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해서 내 마음을 이렇게도 아프게 하느냐.”

그러자 곽의창은 재빨리 눈물을 훔치며 이렇게 대답했다.

“천장에서 떨어진 흙이 눈에 들어가서 눈물이 났을 뿐입니다.”

곽의창의 이런 마음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서도 여전했다. 그는 부친의 상을 당하자 어른처럼 통곡하고, 아침저녁으로 죽만 먹고 어머니가 좋은 음식을 만들어 주어도 먹지 않았다. 간혹 그의 큰형인 곽이창(郭以昌)이 출타하면 혼자서 상식(上食)을 올리고, 조문객이 오면 영접해서 곡읍(哭泣)을 하였다. 곽의창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자란 동생 곽유창 또한 효심이 지극했다. 곽유창은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너무 어린 나머지 그는 상복을 입고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여덟 살이 되자 형인 곽이창에게 이렇게 말했다.

“삼년상을 치르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는 예식입니다. 그런데 저 혼자 상복을 입지 못해 천지간에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복제(服制)를 하고 삼년상을 마치려 합니다.”

그러자 큰형은 눈물로 만류했다.

“너의 말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뒤늦게 상복을 입는 일은 선배 학자들도 나무란 일이니 그렇게 할 수 없다.”

이 말은 들은 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저의 심정이 지극히 슬프기는 하나, 형님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선배 학자들의 나무람을 저버리면서까지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후 곽유창은 그 마음을 돌려 어머니를 모시는 데 정성을 쏟았다. 그는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장례와 제사를 모두 당시의 법도인 주자(朱子)의 예식에 따랐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벗지 않은 것은 물론이요, 항상 빈소에 거처했다. 음식은 장례 전에는 메밀가루 한 홉을 물에 타서 마시고, 장례 후에는 나물밥 한 그릇을 구운 소금으로 먹는 것이 전부였다. 상을 마치는 날까지 자신이 해야 할 본분을 다하고, 초상을 치르기 위해 상여가 집을 떠날 때는 그 줄을 잡고 30리 험준한 길을 따랐다. 하관을 할 때는 호곡하는 소리와 가슴을 두드리며 몸부림을 치는 모습이 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비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본 일꾼들도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묘소를 조성하는 일은 딴 곳과는 다르다. 어찌 소홀히 하여 효자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으리오.”

이처럼 곽의창과 곽유창 형제는 지극한 마음으로 부모에게 효성을 다했다. 두 형제가 세상을 떠난 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장원서 별검(掌苑署別檢)을 증직하고 정려를 내려 세상에 널리 알리게 했다.

4. 곽경성의 효행

곽씨 집안에 효자로 알려져 십이정려각 속에 그 존재를 알린 사람이 두 사람 더 있다. 그 중 한 사람은 곽경성(郭景星)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자질을 갖고 있어 언제나 어머니를 편안하게 해드렸다. 나이 열 살이 되기도 전부터 부모님이 즐겨하는 것이라면 비록 뇌성벽력이 치는 캄캄한 밤이라도 반드시 구해드렸다. 곽경성의 이러한 행동은 아버지가 위독했을 때도 그대로 나타났다. 당시 아버지는 오랜 병으로 아주 위독한 상태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갑자기 생선회를 먹고 싶다고 했다. 이에 곽경성은 엄동설한의 한밤중에 저수지로 나아가 두텁게 언 얼음을 깨고 한 자나 되는 가물치를 건져 올렸다. 그의 정성에 하늘도 감동했음인지 위독하던 아버지는 생선회를 먹고 병에 차도를 보였다.

곽경성 이외에 십이정려각 속에는 또 한 사람의 효자가 남아 있다. 그의 비석에는 ‘조선국 효자 처사 포산 곽공지비(朝鮮國孝子處士苞山郭公之碑)’라고 적혀 있다. 이 비석의 주인공 효자 곽공은 우리가 앞에서 말한 효자 형제인 곽의창과 곽유창 중 형인 곽의창이다. 곽의창이 형제의 정려각에 그 이름을 올렸음에도 다시 비석으로 기리는 것은 그의 효성이 얼마나 지극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5. 곽씨 집안의 강인한 여인들

곽씨 집안의 남자들이 부모에게 효성을 다했다면, 여인네들은 가족과 지아비를 위해 여인으로서의 신념을 지켜내었다.

곽재기(郭再祺)의 처 광릉 이씨(廣陵李氏) 가 그런 사람 중 한 분이다. 광릉 이씨는 임진왜란 때 침략해 온 왜군을 만나자 필시 몸이 더럽혀질 것을 알고 스스로 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곽씨 집안의 여인들은 정절을 목숨과 같이 귀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같은 처지에 있던 곽헌의 딸이었던 이씨의 어머니와 그녀의 시숙인 곽재록(郭再祿)의 딸도 함께 순절하였다.

곽씨 집안에는 전쟁이라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자신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강인한 여인들뿐만 아니라, 남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용감한 여인도 있었다. 그 여인이 곽홍원(郭弘垣)의 처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다. 어느 날 강도가 집에 쳐들어와 남편을 칼로 찌르려 했다. 그 순간 밀양 박씨는 남편을 가로막으며 강도의 칼날을 자신의 몸으로 받았다. 그로 인해 남편은 무사했지만 박씨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었다. 하지만 박씨는 임종을 맞이해 이렇게 말을 하며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

“당신을 구하였으니,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곽씨 집안에는 강인하고 용감한 여인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사랑만을 따른 지고지순한 여인도 있었다. 통덕랑(通德郞) 곽수형(郭壽亨)은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깊은 병에 걸렸다. 그러자 이제 갓 시집을 온 부인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남편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백방으로 약을 구했다. 하지만 남편은 차도는커녕 오히려 병이 깊어갈 뿐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게 된 권씨는 밤낮으로 흐느껴 울면서 천지신명께 자신을 데려가고 남편을 살려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하늘도 권씨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권씨는 장례를 치르고 난 뒤부터는 일체의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를 버티던 권씨는 마침내 목을 매어 남편의 뒤를 따라갔다. 면우 곽종석은 권씨 부인의 사랑을 다음과 같이 찬술하였다.

금슬재어(琴瑟在御)[금슬 곁에 두고]

시이백령(矢以百齡)[백년해로 맹세했으니,]

사생전패(死生顚沛)[죽고 사는 갈림길에]

유자시정(惟子是程)[오직 그대만을 따르리라.]

창천불응(蒼天不應)[저 하늘 응답 없고]

후야난신(厚夜難晨)[서광 영영 안 보이니,]

기불가속(旣不可贖)[그 몸 대신 못하기에]

영아무신(寧我無身)[이 몸 같이 가나이다.]

십이정려각에는 권씨와 같이 남편의 뒤를 따른 여인이 또 있다. 그녀는 곽내용(郭乃鎔)의 처 전의 이씨(全義李氏)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효경(孝經)』을 익혀 어른을 봉양함에 빈틈이 없어 일가친척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하지만 이씨는 결혼을 한 지 불과 1년이 되지 못해 남편이 세상을 떠나는 불운을 겪어야만 했다. 그녀는 더 이상 세상에서 살아야 할 의미를 갖지 못했다. 남편의 장례 이후로 식음을 전폐하며 그 뒤를 따를 결심을 했다. 하지만 양가의 부모들은 죽어가는 그녀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이씨의 시부모가 이렇게 말했다.

“외아들을 잃은 우리는 이제 너밖에 의지할 데가 없다.”

하지만 이씨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러자 병석에 있는 친정아버지가 그녀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네가 죽게 된다면 나의 병이 나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 또한 죽게 될 것이다.”

이씨는 차마 아버지를 죽게 하는 불효를 저지를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이씨는 목숨을 이어갈 정도로만 음식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머리를 들고 남을 대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한 집안의 식구라고 해도 그녀의 얼굴을 보거나 말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었다. 그로부터 넉 달 만에 친정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이씨는 다시 음식을 거절하고 끝내 이승에서의 삶을 마쳤다. 장례식 날 그녀의 행상(行喪)이 남편의 묘소 곁을 지나는 순간 묘의 봉축(封築)이 갈라지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것이 곧 합장을 바라는 망자의 소망임을 깨달은 사람들은 이씨를 남편과 함께 묻어 주었다. 이러한 이적이 일어날 정도의 남편에 대한 이씨의 애틋한 마음은 염습하면서 자리 밑에서 발견한 절명사(絶命詞)에 잘 나타나 있다. “슬프다 추풍(秋風)은 어느 곳으로 오나뇨. 외로운 마음은 더욱 슬프고도 슬프도다.……”라는 내용으로 시작되는데, 면우 곽종석은 이에 대해 “절명사의 한 폭 글은 만고에 길이 처절하리라[絶命有詞萬古凄切]”라고 찬술하였다.

[십이정려각의 의미]

현풍곽씨십이정려각은 지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를 여러 가지로 놀라게 한다. 거기에 모셔진 15분 모두는 우리가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행적을 보여주었다. 물론 가치관이 달라진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경우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져 버렸다. 지금에 있어 우리가 그들을 되새기는 뜻은 그들과 같은 행동을 바라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보여준 불굴의 정신에 있는 것이다. 그 불굴의 정신은 나약한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고, 진리와 정의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십이정려각에 모셔진 15분의 그러한 정신은 현풍이라는 땅의 전통이 되어 후손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자라고 있다. '충효세업(忠孝世業) 청백가성(淸白家聲)'은 그러한 후손들에게 하나의 울림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11.19 행정지명 현행화 현풍면 -> 현풍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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