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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00591
한자 琴岩書堂
영어공식명칭 Geumam Seodang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달구벌대로126길 58-8[매곡리 1102-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백지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축|증축 시기/일시 1958년 - 금암서당으로 복원
현 소재지 금암서당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달구벌대로126길 58-8[매곡리 1102-1]지도보기
성격 서당
양식 홑처마 팔작지붕
정면 칸수 5칸
측면 칸수 1.5칸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에 있는, 조선 후기에 세운 서원이었으나 서당으로 복원된 건물.

[개설]

금암서당(琴岩書堂)은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1530~1593]과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1553~1594]을 배향하는 서원이었다. 정사철의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계명(季明), 호는 임하(林下)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70년(선조 3)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서사원(徐思遠)·주유(朱惟) 등과 교유(交遊)하였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관군을 도왔다. 저서로는 『임하집(林下集)』이 있다. 정광천의 자는 자회(子晦), 호는 낙애(洛涯)·송파(松坡)이다. 정사철의 아들이다.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학행과 효행이 뛰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창녕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공을 세웠다. 저서로 『낙애 선생 문집(洛涯先生文集)』이 있다.

[위치]

금암서당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달구벌대로126길 58-8[매곡리 1102-1]에 있다. 다사읍사무소 정문에서 남동쪽으로 12m 이동 후 우회전한다. 900m 직진 후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 약 40m 이동 후 달구벌대로126길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약 50m 이동 후 우회전하여 90m 직진한 뒤 갈림길에서 우회전하여 60m 정도 가면 금암 서당이 있다.

[변천]

금암서당은 자료가 소략하여 내력을 명확히 밝히기 어렵다. 『현풍군 읍지(玄風郡邑誌)』, 『조선 환여 승람(朝鮮寰輿勝覽)』, 『달성 군지(達城郡誌)』, 『교남지(嶠南誌)』 등의 읍지류와 서원 현판(懸板) 인 금암서당기(琴岩書堂記)를 통하여 간단한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 금암서당은 1764년(영조 40) 옛 초당(草堂) 터에 사우(祠宇)로 건립되었고, 1786년(정조 10) 서원의 모습을 갖추었다. 흥선 대원군 집권기 때인 1871년(고종 8) 훼철되었다. 1958년 후손들이 힘을 모아 서원이 있던 자리에 강당을 짓고 금암서당으로 복원하였다.

[형태]

금암서당은 훼철 이후 과거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강당만 복원되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1.5칸 규모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평면 구성은 왼쪽으로부터 온돌방 2칸, 2통문의 대청, 온돌방 1칸 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마루 한가운데에는 대량(大樑)의 처짐을 방지하기 위한 원기둥 1본(本)을 대량 하부에 받쳐 놓았다. 상부 구조는 대량 위에 제형 판대공(梯形板臺工)을 세운 삼량가(三樑架)이다.

[현황]

금암서당은 19세기 훼철된 이후 서원으로 복원되지 못하고 서당으로 존속하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서당 1채이다. 임하 초당(林下草堂), 아금정(牙琴亭) 등의 현판이 걸려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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