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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00726
한자 朴宗祐
영어공식명칭 Park Jongu
이칭/별칭 군석(君錫),도곡(陶谷),하빈조수(河濱釣叟),숭정 처사(崇禎處士)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수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7년연표보기 - 박종우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54년연표보기 - 박종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36년 - 박종우 사헌부 지평 증직
거주|이주지 하빈현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묘소|단소 박종우 묘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순천
대표 관직 부사과

[정의]

조선 후기 달성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군석(君錫), 호는 도곡(陶谷)·하빈조수(河濱釣叟). 증조할아버지는 증사복시 정(贈司僕寺正) 박일산(朴一珊)이고, 증조할머니는 참판(參判)을 지낸 김백형(金伯亨)의 딸 증숙인(贈淑人) 고령 김씨(高靈金氏)이다. 할아버지는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을 지낸 박계창(朴繼昌)이며, 할머니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이건(李謇)의 딸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인천 이씨(仁川李氏)이다. 아버지는 증호조 참의 박충윤(朴忠胤)이고 어머니는 첨정(僉正) 이광복(李光復)의 딸 광주 이씨(廣州李氏)이다. 부인은 이약(李若)의 딸인 증숙인 성주 이씨(星州李氏)이다.

[활동 사항]

박종우(朴宗祐)[1587~1654]는 하빈현[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서 출생하였다. 서사원(徐思遠)과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학문에 뜻이 깊었으며 봉선(奉先)과 관련된 예절은 더욱 진력을 다하였다. 정구의 『한강집(寒岡集)』에 상제(喪祭)와 관련하여 박종우와 문답한 내용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박종우는 일찍이 사육신(死六臣) 중 한 명인 5대조 박팽년(朴彭年)의 신주를 옮기는 것에 대하여 정구에게 물었다. 이에 정구는 비록 4대 봉사가 끝이 났지만 박팽년의 업적이 다른 관작을 받은 이와 다르다며, 영원토록 신주를 옮기지 말라고 답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정구가 반대파에 의해 모함을 당해 많은 제자가 연루될 위기에 처해졌다. 서사원은 이 문제를 해결할 인사로 박종우를 추천하였고, 박종우는 힘을 다해 정구를 변무(辨誣)하였다. 당시 박종우는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이에 정경세(鄭經世)와 경상도 관찰사 심열(沈悅)이 박종우에게 시를 보내 그의 문장력을 극찬하였다. 1636년(인조 14) 박종우는 병자호란이 발생하여 청나라 군이 인조가 머무는 남한산성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전투에 참여하려고 하였으나, 양친의 나이가 90세에 가까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경상도 관찰사 심연(沈演)에게 편지를 써서 적들을 물리칠 대책을 개진하였다. 1637년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북쪽을 향해 통곡하였으며, 그동안 썼던 저술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또한 스스로 숭정 처사(崇禎處士)라고 부르면서 생을 마칠 때까지 두문불출하였다. ‘달성 십현(達城十賢)’ 중 한 명으로 꼽히며, 관직은 음보(蔭補)로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2권 2책의 『도곡집(陶谷集)』이 전한다.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2권 1책의 『병자록(丙子錄)』을 저술하였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36년(헌종 2) 사헌부 지평에 증직되었다. 달성군 하빈면 묘리 묘골에 재실인 도곡재(陶谷齋)가 있다. 원래 도곡재박종우의 후손인 박문현(朴文鉉)의 살림집이었으나 1800년대부터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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