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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룡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00924
한자 徐丙龍
영어공식명칭 Seo Byeongryong
이칭/별칭 남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서병룡 대구 농공 은행 행원으로 입사
활동 시기/일시 1909년 - 서병룡 달성 친목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13년 음력 1월 - 서병룡 시회를 가장하여 재건된 달성 친목회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8년 7월 - 서병룡 대구 농공 은행 지배인 대리로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 서병룡 대구 농공 은행 부지배인로 재직
출생지 서병룡 출생지 -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학교|수학지 달성 학교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활동지 서병룡 활동지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달성 친목회 회원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서병룡(徐丙龍)[?~?]은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에서 태어나 20세까지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그 후 달성 학교에 2년간 수학하였다. 재산은 동산·부동산을 합해 시가 2,000원 정도였다. 1908년부터 대구 농공 은행(大邱農工銀行)의 행원으로 근무하면서, 1909년 달성 친목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때 서상일(徐相日)·윤상태(尹相泰)·신상태·남형우(南亨祐)·김재열(金在烈)·안확 등을 알게 되었다.

한 일 병합 뒤인 1913년 음력 정월 보름에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에 위치한 안일암에서 시회를 가장하여 재건된 달성 친목회에 참여하였다. 서상일과 윤상태 등이 시회 참석자들에게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조선이 한 일 병합으로 멸망했으니 우리들은 시조 단군 태황조(檀君太皇祖)에 대해 미안한 일로서 어떻게 해서든지 조선을 원래와 같은 독립국으로 만들어 우리의 행복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였다. 이 말이 있은 후 참석자들은 “서로 형제의 의를 결의하고 반드시 장래 서로 함께 조선을 위하여 노력하자는 상의를 하고, 일동이 모두 그 서약을 저버리고 일치된 행동에서 벗어나면 천벌을 받겠다고 기도”하였다. 이 모임에서 향후 매년 정월 15일을 기념일로 정하여 회합하고 단군의 영위에게 제사 지낼 것을 약속하였다.

1918년 7월부터 대구 농공 은행 지배인 대리, 1919년 4월부터 부지배인으로 종사하는 가운데 전민족적 항일 운동인 3·1 운동 이후 일제 관헌에 체포되어 독립운동에 대한 조사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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