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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 소장 고전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01466
한자 道東書院 所藏 古典籍
영어공식명칭 Old Korean books collected by the Do Dong Seowon
이칭/별칭 도동서원 고전적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문헌/전적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구지서로 726[도동리 3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7년 - 도동서원 소장 고전적 영남 대학교 민족 문화 연구소에서 영인
소장처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구지서로 726[도동리 35]지도보기
간행처 영남 대학교 민족 문화 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학로 280[대동 214-1]
성격 고도서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도동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후기의 고문서와 필사본 일체.

[개설]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의 도동 서원은 1568년(선조 1) 현풍현 동쪽 비슬산 기슭에 건립한 쌍계 서원(雙溪書院)이 전신이다. 쌍계 서원은 1573년(선조 6) 경상 감사의 장계에 의하여 사액되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병화에 소실되어 1604년(선조 37) 중건하게 되었다. 1604년 김굉필(金宏弼)의 묘소가 있는 도동으로 옮겨 중건을 시작하였는데, 당시 서원명을 '보로(甫老)'로 개명하였다. 도동서원이 중건된 후 경상 감사였던 유영순(柳永詢)이 재사액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려서, 1606년 12월 26일 왕의 윤허를 받았다. 이후 1607년에 예조와 경상 감영 사이에 수차례 공문을 통해 서원명을 '도동'으로 정하고, 최종적으로 사액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사액 현판의 하사와 치제(致祭)는 1610년(광해군 2) 4월에 설행되었으며, 이때 한훤당 김굉필의 위패도 함께 봉안하였다. 이후 도동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에도 존치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도동서원 고전적은 1604년의 중건 이후에 제작된 것들로서 서원의 인적 구성, 경제적 기반 및 강학, 제향, 사회적 활동과 관련한 것들이다. 특히 도동서원의 토지와 그 운영에 관한 자료가 가장 많으며, 도동서원 부근에 위치해 있다가 대원군 대에 훼철된 송담 서원(松潭書院) 소장 자료들도 다수 남아 있다.

[저자]

도동서원 소장의 필사본은 대부분 도동서원 측에서 운영상 제작한 것들이다.

[편찬/간행 경위]

도동서원의 운영상 필요에 의하여 생성되었다. 1997년 영남 대학교 민족 문화 연구소에서 『도동서원지』로 영인 간행하였다.

[구성/내용]

도동서원의 전적은 1969년 이춘호의 조사 시에는 95종 529책 이었으나, 현재에는 『경현록(景賢錄)』·『사마 방목(司馬榜目)』·『전운옥편(全韻玉篇)』·『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춘추(春秋)』·『오경백편(五經百篇)』·『경현속록보유(景賢續錄補遺)』 등 7종 23책만 있다. 이 중 『전운옥편』·『어정규장전운』·『춘추』·『오경백편』은 내사본(內賜本)이다.

필사본과 고문서로 구성된 성채 고문서는 105종 215건이 남아 있으며, 중건 초창기인 17세기 자료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18세기 이후의 것인데, 특히 20세기 이후의 경제 관계 자료가 많다. 도동서원 중건 당시 상황은 『도동서원 중창 사적(道東書院重刱事蹟)』을 통해서 그 단면을 살펴볼 수 있으며, 서원 운영을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었던 원장·유사 등 원임의 명단인 『원임안』[1책]과 원생의 명단인 『입원록』[2책]이 있다. 도동서원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인사들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인 『참제록(參祭錄)』[8책], 『알사록(謁祠錄)』[24책], 『분향록(焚香錄)』[1책], 『돈사록(敦事錄)』[2책] 등이 있는데, 이들 자료에 등재된 자들은 성주·창녕·고령·대구·칠곡·합천·인동 등 인근 고을의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대부분 현풍현 내의 인사들로 나타난다.

도동서원과 이해 관계를 같이하는 외곽 사림 세력의 범위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자료로 『심원록(尋院錄)』[22책]이 있으며, 사회적 활동을 유추할 수 있는 것으로 19세기 중반 이후의 일부 통문이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騰草)』[1책]로 묶여져 있다. 도동 서원의 경제적 기반 및 그 운영과 관련해서는 서원 중건 초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의 『노비안』[1책]이 있으며, 『원생안(院生案)』[7책], 『모입안(募入案)』[3책], 『자비안(資備案)』[2책], 『유생안(儒生案)』[1책] 등처럼 원속들을 기재한 것도 있다. 이들 책들은 구체적인 작성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 18세기 중반 내지 19세기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월차 철물록(月次鐵物錄)』은 중건 초기 서원 소속 산직(山直)의 서원에 대한 철물 납부 상황을 기록하고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서원 전답과 관련해서는 신축·경자년의 『전답안(田畓案)』[2책]과 『전고 수세 성책(田庫收税成册)』, 『원전 수세기(院田收税記)』가 있는데 이를 통해 도동서원의 전답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기타 재정 관련 자료로 『정안(正案)』[17책], 『별보정안(別補正案)』[11책], 『둔조기(屯租記)』[7책], 『도지책(賭地册)』[5책] 등이 다수 소장되어 있는데, 이들 자료는 19세기 말의 몇 건을 제외하면 대부분 일제 강점기에 작성된 것으로 그 내용도 단편적인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말 이래로 서원 경제의 변화상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들 자료의 면밀한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

『육영재 완의 절목(育英齋完議節目)』과 『계안(稧案)』, 19세기 초·중반의『중수물력도총(重修物力都摠)』[2책], 『묘실 이건 시도기(廟室移建時到記)』, 『경자이안원회하기(庚子移安院會下記)』, 원임 교체 시 인수·인계 문서인 『전장기(傳掌記)』[3책] 등은 도동서원의 역사와 경제력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다. 이외에도 『경현록 중간 시하기(景賢錄重刊時下記)』, 『경현록 본원 보유급 반질기(景賢錄本院保有及頒帙記)』, 『필재 김 선생 문인록 분책기(畢齋金先生門人錄分冊記)』, 『필재 문인록…하기 정안책(畢齋門人錄…下記正案冊)』등이 있다. 이들 자료는 책판과 더불어 도동서원의 출판 문화를 알 수 있는 것들이다.

한편 도동서원에는 서원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향촌 사회 연구에 중요한 자료인 현풍현『향안(鄕案)』 2책과 1621년의 향안 작성 당시에 제정된 규정과 계축년에 일부 고친 규정을 1786년에 등서(謄書)한 『향안 설립 초 정규 등초(鄕案設立初定規腾草)』가 소장되어 있다. 이 자료는 향약적인 요소를 전혀 가미하지 않은 대표적인 향규(鄕規)로 보인다. 이 향규에는 향안 등재와 향임(鄕任) 선출, 향임자의 직무와 제재, 원악 향리(元惡鄕吏) 규찰과 공부(貢賦), 요역(摇役) 부과, 향회(鄕會)에 관한 규정 등을 담고 있다. 이외에는 대암(大庵) 박성(朴惺)[1549~1605]을 제향한 송담 서원(松潭書院)의 자료가 있다. 이 자료는 대원군 훼철 당시에 이관된 것으로 짐작되는데, 『임안록(任案錄)』[1책], 『원임안(院任案)』[1책], 『알사록(謁祠錄)』[8책], 『심원록(尋院錄)』[3책]), 『원생안』[1책], 『유전 수합기(儒錢收合記)』[1책], 명문(明文) 1건 등이다. 특히 『알사록』은 서원 건립 당시부터 19세기 초까지의 기록이 온전히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도동서원의 역사와 운영, 향촌 사회 활동 등을 알려주는 자료들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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