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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암집』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01481
한자 臺巖集
이칭/별칭 『대암 문집(臺巖文集)』,『대암 선생 문집(臺巖先生文集)』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문헌/전적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보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간행 시기/일시 1811년연표보기 - 『대암집』 간행
소장처 연세 대학교 학술 정보원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신촌동 134]
소장처 하계 서숙 - 경상북도 경주시
소장처 하버드 대학교 연경학사 -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시
성격 고도서|시문집
저자 최동집
편자 최흥벽
권책 4권 2책
행자 10행 18자
규격 31.5㎝[세로]|21.0㎝[가로]
어미 상하 내향 이엽 화문 어미

[정의]

조선 후기 학자인 최동집의 시문집.

[저자]

최동집(崔東㠍)[1586~1661]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진중(鎭仲), 호는 대암(臺巖)이다. 아버지는 현령 최계(崔誡)이다.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6년(광해군 8) 병진 증광시(增廣試)에 진사(進士) 3등 51위로 합격하였고, 정묘호란에는 의병을 규합하였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고 대군의 스승이 되었다. 서사원(徐思遠), 손처눌(孫處訥) 등과 도의교를 맺었다. 뒤에 팔공산(八公山) 농연(聾淵) 가에 들어가 다시 나오지 않았다.

[편찬/간행 경위]

『대암집(臺巖集)』은 처음 최흥원(崔興遠)이 유고(遺稿)를 수습하였고, 5세손 최흥벽(崔興璧) 등이 수정, 편집하여 1811년(순조 11)에 간행하였다. 권두에 정종로(鄭宗魯)의 서문과 권말에 최흥벽의 발문이 실려 있다. 『대암 문집(臺巖文集)』, 『대암 선생 문집(臺巖先生文集)』이라고도 불린다.

[형태/서지]

목판본 4권 2책으로 되어 있다. 판식은 사주 쌍변(四周雙邊)에 계선(界線)이 있으며, 상하 내향 이엽 화문 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이다. 크기는 세로 31.5㎝, 가로 21.0㎝이며, 반곽은 세로 20.8㎝, 가로 15.7㎝이다. 1면 10행에 1행의 자수는 18자로 되어 있다. 연세 대학교 학술 정보원, 하계 서숙(霞溪書塾), 하버드 대학교 연경학사(燕京學社)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권1에 시 78수, 권2에 서(書) 5편, 서(序) 1편, 기(記) 2편, 발(跋) 1편이 있으며 권3에 제문(祭文) 4편, 묘갈명 2편, 잡저(雜著) 5편, 권4는 부록으로 만사(輓詞) 1수, 묘갈명 1편, 농연 유허비명(聾淵遺墟碑銘) 1편, 기증시 6수, 「농연제시(聾淵諸詩)」 2수, 「농연 서당 중건 상량문(聾淵書堂重建上樑文)」 1편, 「농연 서당기」 2편, 「보본재기(報本齋記)」 1편, 「개제시고유문(改題時告由文)」 1편, 「손모당 일기(孫慕堂日記)」 1편, 「문노천 일기(文爐川日記)」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잡저의 「재화책(財貨策)」은 국가의 재정을 풍족하게 하면서 백성도 유족하게 하는 경국(經國)의 방도를 밝힌 것으로, 국가 재정의 근본이 양입(量入)과 절용(節用)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기 중 「연경 서원 인지당 상량기(硏經書院仁智堂上樑記)」는 1563년(명종 18) 연경 서원이 창건된 뒤 임진왜란을 겪어 폐허가 되었으나, 재실을 복설하고 1645년(인조 23) 봄 인지당까지 지은 전말사를 소상하게 기록한 것으로, 당시의 서원 제도 연구에 참고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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