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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B010201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리 씩실마을
집필자 송호상

[정의]

승호교 건설로 마을과 논공 들을 이어

[달성군 새마을운동의 선두주자]

새마을운동은 1960년대 정부에 의해 전개된 재건국민운동 등의 성과를 돌이켜 보는 가운데 시행된 것이다. 당시 산업화의 여파로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농촌의 개발을 위해 근면·자조·협동의 기본 정신과 실천을 범국민적·범국가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러한 새마을운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소득증대 부분이었다. 이를 통해서 만이 다른 과제도 지속적으로 운영이 가능한 것이었다.

삼리1리 씩실마을은 여느 농촌처럼 벼 보리와 밭농사를 중심으로 해 오던 가난한 마을이었다. 낙동강이 홍수로 범람하면 마을아래까지 물에 잠길 정도의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마을에는 마당과 길의 구분이 없었으며, 위생시설이 부족하여 주거환경도 열악하였다.

그런 가운데 1965년 낙동강 제방공사가 완료되면서 논공들이 비옥한 안전답으로 바뀌게 되면서 농업 환경이 개선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 당시 마을 출신으로서 서울대 농대를 나온 이원경의 주도하에 수박농사를 시작하게 되면서 마을의 경제적 형편이 개선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삼리1리 씩실마을에서도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승호교 건설, 새마을운동의 첫 사업]

첫 새마을지도자의 일을 맡은 이영곤(李永坤)은 마을 주민들에게 새마을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더 좋은 환경과 잘사는 마을을 함께 만들자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주민들을 설득하고 단합을 호소하였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처음 추진한 사업이 승호교의 가설이었다. 삼리 1리 씩실마을에는 낙동강의 범람에 의해 만들어진 승호(씩실늪)가 있다. 이 승호는 길이가 1km 정도, 폭이 15m 정도로서 강과 평행되게 있었다. 이로 인해 농사일을 하는 논공들과 마을 사이의 교통이 불편한 상황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민들이 나무를 이용하여 간이다리를 설치하여 사용해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통행하는 것과 농산물 운반 등에 한계가 많았으며 주민이 빠져 죽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주민들에게는 제대로 된 승호교 건설이 가장 큰 숙원사업이었던 것이다.

지도자 이영곤은 새마을운동 시험사업으로 승호교 건설을 추진하면서 자매결연기관인 대구지방검찰청(검사부장 이영기)으로부터 양회(洋灰) 100부대와 철근 0.5 M/T, 의료품 100여점과 새마을문고에 도서 30권을 기부받았다. 그리고 검사와 직원들이 마을에 와서 통일벼 모내기를 함께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을주민들도 당시 지가로 약 300원 정도 되는 300평 정도의 토지를 기부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지원과 마을주민의 협조로 이영곤은 승호교 건설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다.

그 외에도 정부의 지원과 마을주민이 공동으로 부담하여 하수구 설치, 마을안길 확장과 석축조성, 지붕개량 등 마을 환경개선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마을주거환경개선사업과 더불어 주민소득증대를 위한 사업도 전개하였다. 낮에는 환경개선사업을, 밤에는 특수작물 재배기술을 습득케 하여 소득증대 부분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를 통해 1973년 초가 80동을 기와로 개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초창기 새마을사업의 성과는 마을 주민들에게 성취감을 심어 주어 새마을운동에 적극 동참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참고 문헌]

『영광의 발자취-마을 단위 새마을운동 추진사』 제4집, (마을문고 본부, 1981)

[정보제공자]

이산출 (남, 1942년생,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1리 씩실마을 전 새마을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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