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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지배의 상징 신사가 마을 뒷산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B020103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리 씩실마을
집필자 송호상

[정의]

일제 지배의 상징 신사가 마을 뒷산에

[신사정책의 목적]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 황국신민화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신사정책을 강화하였다. 신사정책은 치안 유지와 더불어 각종 종교단체를 전쟁에 협력시키는 수단으로 시행되었다. 또한 관민일체(官民一體)로 조선 민중을 전쟁에 동원하고자 하는 국민운동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다. 이를 위해 1936년 「신사제도 개정」에 대한 칙령을 통해 ‘일읍일면신사’(一邑面一神社)를 공포하였던 것이다.

[경북지역의 신사건립현황]

일제는 일찍이 이 땅에 진출한 일본인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신사(神社)를 건립하였다. 1907년 대구에 신사가 건립된 이래로 김천, 포항, 경주 등 주요 도시에 신사를 건립하였다. 이후 신사(神社) 건립이 어려운 지역은 신사(神祠)를 세워 이른바 내선일체를 통한 전시동원체제를 강화시켜 나가고자 하였다.

신사(神祠)는 신사(神社)의 존엄을 해치지 않으면서 간소히 신사와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러한 神祠를 설립하려면 숭경자가 될 만한 10인 이상이 연서(연서) 해야만 하며,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일제는 이러한 성격의 신사(神祠)를 전국의 모든 면에 설립을 추진하였다. 달성군에도 1918년 해안면에 신사가 건립된 이래로 1934년에는 현풍면[현 현풍읍] 성하동과 화원면 구라동에 신사가 건립되었다. 이어 1939년 11월 15일 구지면 창동에 신사가 건립되었다.

[삼리에도 신사(神祠)가]

달성군 논공면에도 신사가 건립되었다. 백종석 외 9명으로부터 청원을 받은 당국이 1943년 12월 20일 마침내 설립을 허가한 것이다. 당시 전국에 건립된 신사는 신메이신사(神明神祠)였다. 신메이신사는 현세구복적 신사이지만 전시체제하 황조신의 성격을 가진 아미테라스를 모시기 때문에 총독부의 정책에 적합한 조건을 갖춘 것이었다. 즉 신메이신사가 신사참배의 강제기관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논공면 삼리리의 신사는 “비슬산 자락에서 해가 뜨면 제일 먼저 빛이 드는 곳”(이달지, 남, 77세)이라고 알려진 삼리리 씩실 마을의 뒷산에 건립되었다. 이 신사에서 논공면 주민들이 신사참배를 하거나 징병자들을 위한 축하행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신사에 대해

“신사가 있었던 모신자리 터가 사각형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가 어릴 때 마을 사람들이 달불 놓고 하는 그 자리에 신사가 있었지요. 그 동쪽에 옛날 큰 무덤들이 있었고, 산 아래 지금 국도 쪽에서 부터 신사쪽으로 계단이 되어 있었지, 나무로... 연병장 광장처럼 축대가 이렇게 쌓여 있었고, 일본 신을 모시는 공간이고 집은 없었고 형태만 있었다 카이...화강석으로 만든 긴데 타원형 비슷한 건데, 물을 받아가지고 사용했지 싶은데 엄청 커요. 그걸 해방되고 나서 우리가 왜놈들 꺼라 카믄서 ... 친구들 하고 그때 그놈을 굴려 가지고 산 너머 과수원 담장 있는 옆으로 밀어 버렸다카이... (이달지, 남, 80세)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전국의 신사 또한 그 수명을 다했다. 조선 총독부는 1945년 8월 15일 각 지역의 신사에서 신령을 하늘을 통해 본국으로 보내는 승신식(昇神式)을 일제히 실시하게 했다. 그 이후 신사의 시설물들은 마을 주민의 증언과 같이 파괴되어 버렸다.

〔참고문헌〕

『大陸神社大觀』(大陸神道聯盟, 1941)

『朝鮮總督府 官報』 第5070號, 昭和18年 12月27日(1943.12.27)

山口公一 「戰時期(1937~45) 조선총독부의 神社政策」『한일관계사연구』 8, (한일관계사학회, 1998)

문혜진 「일제식민지기 경성신사-신사 및 제신의 시기별 성격을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36권 3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정보제공자〕

이달지, (남 1938년생,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1리 씩실마을 주민)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11.09 행정지명 현행화 현풍면 -> 현풍면[현 현풍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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