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나무 산판에서 나물 채취까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C020102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집필자 여수경

[정의]

나무 산판에서 나물 채취까지

[항공유 제조를 위한 관솔 채취]

일제강점기 말기 일본은 전쟁에서 사용할 다양한 물자들을 그들이 점령하고 있는 식민지 국가에서 빼앗아간다. 각종 전쟁 무기를 만들기 위한 원재료로서 놋그릇과 수저, 솥 등이 대상이었고, 주변 산에서는 항공유를 생산하기 위한 관솔 일명 소나무를 채취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일본 사람들이 와서 살지는 않았고, 여기 일본 병정들이 나무를 많이 있었거든. 옛날 그 요새도 할꺼거든. 금광에 파가지고 위에 세워가지고 굉목을 많이 해가지고 갔어요. 병정들이. 여기 소나무가 많아가지고. 그거를 잘라가지고 길이를 요새 같으면 열자 이래 해가지고 가가지고 통발로 만든다고 그래가지고 밑에서 깔고 지붕씌우고 그래가지고. 관솔도 많이 따고. 솔기름 쓴다고 송진내가지고 기름 맨들어서 비행기에 배에 실어가지고 그런 것을 가지고 할려고. (기름 짜는 가마는) 여기는 그런 것은 없고 댐 밑에 걸어놓고 했었어.(제0근)

항공유를 만들기 위한 관솔 채취는 산이 많은 한국에서는 전국에서 걸쳐 이루어졌다. 주변 산이 많고 소나무가 즐비한 정대1리 역시 이러한 관솔 채취에서 제외될 수 없었다. 채취된 관솔은 일명 송탄요라 불리는 가마에서 기름으로 바뀌었는데, 정대1리에서는 관솔 채취 후 가창댐 인근의 송탄요에서 기름으로 바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무를 찾아 온 산판꾼과 숯을 만드는 사람들]

1950년 정대1리 산에는 산판꾼들이 봉화에서 몰려 들어왔다. 산판꾼은 벌목 또는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강원도 사투리이지만, 나무를 하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자유당 시절에는 산이 나무가 전부다 굵었어요. 저 봉화에 온 사람들이 들어 와가지고 산판한다고. 그때는 묶어가지고 한단에 얼마 얼마 그랬으니. 시내 상동에 있는 사람들이 구르마 말구르마 가가지고 와가지고 그리 했어요.(김진고, 1938년생)

말 또는 소달구지를 통해 산에서 캔 나무들은 대구시 화원시장과 남문시장 일대로 팔려 나갔다. 비단 전문 산판꾼이 아니어도 1950~60년대 당시 정대1리 사람들의 주요 수입원은 나무 판매였다. 전문 산판꾼이 말과 소달구지를 활용하여 대량으로 나무를 가져간다면 마을 사람들은 개개인이 나무로 만든 농기구나 또는 화목(火木)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활용할 토지가 적어 농사 수입만으로는 가족들이 먹고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대부분의 집에서는 나무를 팔아 식구들의 먹여 살리거나 아이들의 학자금을 마련하였다. 인근 청도 사람들은 헐티로를 대신하여 대구와 인근 지역을 연결하는 윙계재에는 인근 청도와 정대리 사람들이 행렬을 이루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수박골에서 여 내미니골 넘어서 재를 넘어서 나무해가지고 가고. 청도사람들 나무해가지고 가고 이랬답니다. 그때는 예나 나무 산판다리 카는거 그런거. 여는 나무 구르마 해가지고. 쫌 낫는 사람은 나무 구르마하고 안 그러면 또 리어카 끄실고 가고. 조 밑에 당나무 있지예? 큰 거? 거 우에 조끔하이 너른데 거가 구르마 장소라. 거 구르마 갖다 대놓고 그래 했는데, 지금은 고마 없어졌어예.(이0남)

산판꾼과 함께 마을을 찾은 다른 사람들은 숯을 만드는 이들이다. 한덤이 마을 부근에는 지금은 숲이 우거져서 접근할 수 없지만 일명 숯구덩이로 알려진 숯가마의 흔적이 아직도 있다. 화목과 함께 당시 시장에서 거래된 숯은 일반 가정에서 오늘의 석유와 석탄 대신 사용하던 것으로 숯구덩이는 이러한 숯을 만드는 곳이다.

[나물채취는 부수입으로]

1970년대 상수원보호구역과 개발제한구역이 되면서 정대1리에 성행했던 산판꾼과 숯가마들은 퇴색하게 된다. 이후 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나무 벌목이 제한되었고, 생활 변화로 인해 나무는 더 이상 시장에서 화목 등의 이름으로 거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판꾼들과 떠난 자리 정대1리 주변 산에는 이제 부녀자들의 나물 채취로 분주하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될 무렵이면 정대1리 마을에서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도 묵묵부답이다. 잠시 지나는 사람을 붙잡아도 어디론가 황급히 가는 발걸음에 쉽게 말을 걸기도 어렵다. 대부분 산으로 나물을 캐러 가는 발걸음이다.

여기는 봄에 사람 만나기 어려워요. 지팡이만 짚으면 산에 가서 나물 캐잖아요. 옛날부터 그랬어요. 캐가지고 팔면 그래도 돈이 되는데. 여기 나물은 깨끗하다고 해서 시내사람들이 좋아해요.(김0생)

정대1리 나물 채취가 비단 오늘의 일은 아니다. 적은 농지에 많은 식구들이 생활해야 할 때 나물 채취는 부족한 식량을 대신할 구항식물이었다. 때때로 시장에 팔면서 가계에 조금씩 보탬이 되기도 하였다.

2016년 현재 나물 채취는 부녀자들의 부수입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산골 마을에서 특별히 수입이 없는 이들에게 나물 채취는 건강도 챙기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일석이조의 좋은 수입원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대1리 인근의 나물들은 청정지역자연산으로 알려지면서 다른 곳에 비하여 비교적 좋은 가격에 판매될 뿐만 아니라 이를 찾아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다.

[정보 제공자]

제0근(남, 1931년,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평지마 거주)

김0고(남, 1938년,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바깥매남 가주)

이0남(여, 1932년,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한더미 거주)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