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5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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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見寺 - |
이칭/별칭 | 대견사지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유적/터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용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박병선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용리 비슬산 정상부에 있는 신라 시대의 절터.
[개설]
대견사 터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용리 비슬산 정상 부근에 있는 폐사 터였으나 지금은 대견사로 다시 개창된 곳이다. 전성기에 대견사는 비슬산의 중심 사찰이었다고 한다.
[변천]
비슬산에는 바위들이 많다. 부처 바위 뒤로 연화봉이 솟아 있고 말바위·소원 바위·스님 바위·코끼리 바위·형제 바위 등 수많은 바위들이 우뚝우뚝 자리한 가운데 대견사 터가 있다. 어느 때 누가 창건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흥덕왕(興德王)[826~836] 때 창건되었을 것이라고만 추정되는 이 절에 얽힌 전설은 다음과 같다. 당나라 문종[827~839]이 절 지을 곳을 찾고 있었다. 하루는 세수를 하려고 떠 놓은 대야의 물에 아주 아름다운 경관이 나타났다. 이곳이 절을 지을 곳이라 생각한 문종은 신하들을 파견하여 그곳을 찾게 하였다. 결국 중국에서는 찾을 수 없게 되자 신라로 사람을 보내어 찾아낸 곳이 바로 대견사 터였다. 이 터가 중국[대국]에서 보였던 절터라 하여 절을 창건한 뒤 절 이름을 '대견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1416년(태종 16) 2월 29일과 1423년(세종 5) 11월 29일에 대견사에 있던 장육 관음상(丈六觀音像)이 땀을 흘려 조정에까지 보고된 일이 있었다. 종파는 교종에 속하였고, 절은 빈대가 많아 불태워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그 시기는 임진왜란 전후라고 한다. 그 뒤 1900년(고종 37)에 영친왕(英親王)[1897~1970]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이재인(李在仁)이라는 사람이 중창하였으나 1908년(순종 2)에 허물어지기 시작하여 1909년(순종 3)에는 폐허가 되었다.
[현황]
현재 대견사 터에는 신라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 30m, 높이 6m의 거대한 축대가 남아 있고, 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된 대견사지 삼층 석탑(大見寺址三層石塔)과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동굴 대좌 등이 남아 있다. 동굴은 참선 또는 염불 도량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기록된 땀 흘린 관음상은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35로 지정된 달성 용봉동 석불입상(達城龍鳳洞石佛立像)으로 알려져 있다.
대견사 터의 남쪽 절벽 위에 있는 삼층 석탑은 붕괴되어 흩어져 있던 석재를 1988년에 달성군에서 복원한 것이다. 탑의 주변에는 석탑 대석이 있고 위쪽 암벽에는 꽃을 조각한 흔적이 남아 있다. 복원된 탑을 전체적으로 보면 탑 모양이 가늘고 높게 올라갔다. 이 돌탑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에서 벗어나 퇴화된 양식을 보이는 고려 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탑 옆에는 용도 불명의 석재 단이 남아 있다. 절터의 북쪽 평탄한 곳에는 본당의 유지(遺址)로 추측되는 기단 석축열[12.7mx16m]이 남아 있고, 그 기단석 내부에는 한 변이 147㎝이고 높이가 50㎝인 거대한 8엽의 연화 대석이 있어 본존불을 안치하였던 연화 대좌(蓮花臺座)로 판단된다. 추정 본당 뒤에 있는 자연 동굴 내부는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참선을 하였던 곳으로 추정되며, 동굴 입구 머리맡 바위 전면에는 음각의 선각(線刻) 불상이 새겨져 있다. 음각의 문양을 살펴보면 하부에는 높이 21㎝의 연화 대좌를 조각하여 놓았고, 대좌 상면으로는 5개의 원형을 아래가 넓게 중첩되게 새겨 놓았으며, 중첩 원형의 하단부 좌우로는 다시 고사리 문양이 서로 대칭되게 새겨져 있어 마치 화염문(火焰文)에 둘러싸인 부처의 형상을 조각한 것 같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추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 좀 더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산 밑에 있는 소재사(消災寺)는 옛날 대견사의 식량이나 각종 생활용품과 의식용품 등을 공급하던 곳이었다고 하며, 소재사 앞터에는 방앗간을 비롯하여 두부 공장과 기왓골 등도 있었다 한다. 현재 대견사의 축대 밑에는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터가 있으며, 가뭄 때면 달성군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기우제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