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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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兪命岳 碑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성화로 8[성산리 489-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동락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대구 판관 유명악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군.
[개설]
유명악(兪命岳)[1667~?]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기계(杞溪), 호는 만휴정(晩休亭)이다. 1705년(숙종 3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13년(숙종 39)부터 1716년(숙종 42) 1월까지 대구 판관을 지냈으며, 대구 석빙고를 최초로 설치하였다. 판관 재임 시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이 많아지자 곡식을 나눠 주어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여 대구의 33개 방(坊)에 선정비를 하나씩 세웠다고 한다. 유명악 비군에 있는 선정비는 화원읍 지역의 8개 방에 세웠던 선정비를 모은 것이다. 유명악 선정비는 화원읍에 위치한 8기 외에 경상 감영 공원에 1기, 경북 대학교 박물관에 4기 등 총 13기가 남아 있다.
[위치]
유명악 비군은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에 있는 화원 성명 교회 좌측 도로변에 위치한다. 비각 안에 8기의 비석과 「대구 판관 유명악 화원 비각 중수기」가 보관되어 있다. 8기의 비석은 모두 3열로 배치되어 있는데, 1열에 2기, 2열에 3기, 3열에 3기가 있다. 2열의 1기만 전면이 서쪽 방향으로 향하고 있고, 나머지 7기는 전면이 남쪽 방향인 도로 쪽을 보고 있다.
[형태]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지은 비각 안에 총 8기의 비석이 3열로 배치되어 있다.
1열 왼쪽 첫 번째 판관 유후 선정비(判官兪侯善政碑)는 비신과 하엽형(荷葉形) 개석이 분리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79㎝, 너비 39㎝, 두께 14㎝이다. 두 번째 판관 유후 명악 영세 불망비(判官兪侯命岳永世不忘碑)는 비신과 하엽형 개석이 한 돌로 되어 있다. 규모는 현고 94㎝, 비신 높이 56㎝, 너비 38㎝, 두께 15㎝이다.
2열 왼쪽 첫 번째 판관 유후 명악 영세 불망비(判官兪侯命岳永世不忘碑)는 원수형 비신 형태이며, 상광하협 형태이다. 규모는 비신 높이 135㎝, 너비 80~65㎝, 두께 25~20㎝이다. 두 번째 판관 유후 휘 명악 영세 불망비(判官兪侯諱命岳永世不忘碑)는 원수형 비신 형태이다. 규모는 비신 높이 74㎝, 너비 43㎝, 두께 13㎝이다. 세 번째 판관 유후 휘 명악 영세 불망비(判官兪侯諱命岳永世不忘碑)는 원수형 비신 형태이다. 규모는 비신 높이 71㎝, 너비 37㎝, 두께 14㎝이다.
3열 왼쪽 첫 번째 판관 유후 휘 명악 영세 불망비(判官兪侯諱命岳永世不忘碑)는 비신과 하엽형 개석이 한 돌로 되어 있다. 규모는 현고 134㎝, 비신 높이 80㎝, 너비 39㎝, 두께 13㎝이다. 두 번째 판관 유후 선정비(判官兪侯善政碑)는 비신과 개석이 있다. 규모는 현고 124㎝, 비신 높이 80㎝, 너비 35㎝, 두께 16.5㎝이다. 세 번째 판관 유후 명악 애민 선정비(判官兪侯命岳愛民善政碑)는 비신과 하엽형 개석으로 되어 있다. 규모는 현고 135㎝, 비신 높이 89㎝, 너비 40.5㎝, 두께 14㎝이다.
[금석문]
1열 왼쪽 첫 번째는 전면 중앙에 '판관 유후 선정비(判官兪侯善政碑)'라 쓰여 있고, 그 왼쪽에 “흡읍화□ □□□□(洽邑和□ □□□□) 일편□□ □□□□(一片□□ □□□□)”이라 적혀 있다. 두 번째는 전면 중앙에 ‘판관 유후 명악 영세 불망비(判官兪侯命岳永世不忘碑)’라 적혀 있고, 그 왼쪽에 “병신 사월 일립(丙申四月日立)”이라 쓰여 있다. 병신년은 1716년이다.
2열 왼쪽 첫 번째는 전면 중앙에 ‘판관 유후 명악 영세 불망비(判官兪侯命岳永世不忘碑)’라 쓰여 있고, 그 오른쪽에는 “감물천방(甘勿川坊)”, 왼쪽에는 “갑오 시월 일(甲午十月日)”이라 쓰여 있다. 갑오년은 1714년이다. 두 번째는 전면 중앙에 ‘판관 유후 휘 명악 영세 불망비(判官兪侯諱命岳永世不忘碑)’라 쓰여 있다. 그 오른쪽에는 “정해[1767] 사월 일(丁亥四月日)”이라 적혀 있고, 그 왼쪽에는 “옥포소립비훼상고팔방개립(玉浦所立碑毁傷故八坊改立)”이라 적혀 있다. 세 번째는 전면 중앙에 ‘판관 유후 휘 명악 영세 불망비(判官兪侯諱命岳永世不忘碑)’라 적혀 있고, 그 왼쪽에 “병신 시월 일 법화방립(丙申十月日法化坊立)”이라 적혀 있다. 병신년은 1716년이다.
3열 왼쪽 첫 번째는 전면 중앙에 ‘판관 유후 휘 명악 영세 불망비(判官兪侯諱命岳永世不忘碑)’라 적혀 있고, 그 왼쪽에 “병신 이월 일 인흥립(丙申二月日仁興立)”이라 적혀 있다. 병신년은 1716년이다. 두 번째는 전면 중앙에 ‘판관 유후 선정비(判官兪侯善政碑)’라 적혀 있고, 그 오른쪽에 “사년 간 판관으로 계시면서 소신신(召信臣)과 두시(杜詩) 같은 은택 남기셨네[四載莅民 召杜遺澤]라 적었고, 왼쪽에는 “우러러 보답할 수 없어 한 조각 돌에 새기노라[無以仰答 一片斯石]"이라 썼다. 끝부분에는 “병신 이월 일 월배방립(丙申二月日月背坊立)”이라 썼다. 병신년은 1716년이다. 세 번째는 전면 중앙에 ‘판관 유후 명악 애민 선정비(判官兪侯命岳愛民善政碑)’라 썼고, 그 오른쪽에는 “화현내면(花縣內面)”, 왼쪽에는 “을미 이월 일(乙未二月日)”이라 썼다. 을미년은 1715년이다.
[현황]
비석의 하부는 모두 매몰되어 있는 상태이며, 1열의 좌측 첫 번째 비는 비신 앞에 개석이 분리되어 놓여 있다. 비석은 약간의 훼손이 있는 것도 있으며, 비문은 보기에 어려움이 있는 1열 좌측 첫 번째 비만 제외하면 판독에 무리가 없다.
[의의와 평가]
유명악 비군은 조선 후기 대구 판관 유명악이 펼친 행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며, 조선 후기의 선정비를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