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5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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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淵寺 碑石群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용연사길 260[반송리 산54-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동락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반송리 용연사 경내에 있는 조선 후기 및 일제 강점기의 비석군.
[개설]
용연사 경내에는 비슬산 용연사 중수비(琵瑟山龍淵寺重修碑)[1722], 사바 교주 석가여래 부도비(娑婆敎主釋迦如來浮圖碑)[1676], 석가여래 사리탑 중수비(釋迦如來舍利塔重修碑)[1934], 동운 대사 비(東雲大師碑)[1644], 송파 대사 비(松坡大師碑)[1676] 등 5기의 비가 유존하고 있다. 비슬산 용연사 중수비는 조선 후기 용연사의 중창과 관련된 내용이, 사바 교주 석가여래 부도비는 용연사 금강계단의 조성 과정이, 석가여래 사리탑 중수비는 금강계단 중수와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비이다.
[위치]
용연사 금강계단 좌측에 비슬산 용연사 중수비, 우측에 사바 교주 석가여래 부도비와 석가여래 사리탑 중수비가 위치한다. 금강계단 쪽에 있는 요사채의 왼쪽으로 가면 용연사 부도군이 나타나는데, 이곳에 동운 대사 비와 송파 대사 비가 세워져 있다.
[형태]
비슬산 용연사 중수비는 비좌 위에 비신을 세우고 옥개석(屋蓋石)을 올렸다. 비좌 높이 58㎝, 길이 117㎝, 너비 70㎝이고, 비신 높이 142㎝, 너비 58㎝, 두께 30㎝, 옥개 높이 41㎝이다. 사바 교주 석가여래 부도비는 비좌 위에 원수형(圓首形)의 비신을 세웠다. 비좌 높이 60㎝, 길이 124㎝, 너비 91㎝이고, 비신 높이 181㎝, 너비 65㎝, 두께 20㎝이다. 석가여래 사리탑 중수비는 비좌 위에 규수형(圭首形)의 비신을 세웠다. 비좌 높이 30㎝, 길이 78㎝, 너비 56㎝이고, 비신 높이 129㎝, 너비 35㎝, 두께 16㎝이다. 동운 대사 비는 비좌 위에 원수형(圓首形)의 비신을 세웠다. 비좌 길이 128㎝, 너비 92㎝이고, 비신 높이 130㎝, 너비 51㎝, 두께 12.5㎝이다. 송파 대사 비는 비좌 위에 원수형(圓首形)의 비신을 세웠다. 비좌 길이 105㎝, 너비 85㎝이고, 비신 높이 134㎝, 너비 44㎝, 두께 23㎝이다.
[금석문]
1. 비슬산 용연사 중수비
전면 상부에 '비슬산용(琵瑟山龍)', 좌측면 상부에 '연사(淵寺)', 후면 상부에 '중수비(重修碑)'라 써 있다. 전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하 박연희의 판독과 이기영의 해석에 따랐다.
“조선국 대구 비슬산 용연사 중수비(朝鮮國大邱琵瑟山龍淵寺重修碑)
통훈대부 전 행홍문관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기주관 교서관교리 중학교수 세자시강원문학(通訓大夫前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記注官校書館校理中學敎授世子侍講院文學) 임수간(任守幹) 지음.
통훈대부 전 형조정랑(通訓大夫前刑曹正郞) 남한명(南漢明) 씀.
달성(達城)의 남쪽 50리쯤 되는 곳에 비슬(琵瑟)이라고 하는 산이 있는데, 소슬(所瑟)이라고도 부른다. 범어(梵語)로 하면 운포(云苞)라고 한다. 신라시대 때 인도의 승려가 동쪽으로 유람한 것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비야(毗耶)[유마 거사(維摩居士)가 거처하던 곳]와 지제(支提)[탑]와 같은 류이나 지금은 상고할 수 없다. 지리지에는 ‘신승(神僧) 관기(觀機)와 도성(道成)이 포산(苞山)의 남북에 살았으며, 두 대사가 상대방을 원하는 마음을 가지면 산속의 초목이 그대로 엎드렸다.’고 하였다. 선림(禪林)의 신령한 자취가 이 산에 드러난 것은 그 유래가 깊어서이다.
산의 동쪽에 ‘용연(龍淵)’이라고 하는 절이 있다. 골짜기에 신룡(神龍)의 소굴이 있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혹자는 신라의 보양 선사(寶壤禪師)가 중국에 들어가 종남산(終南山)의 지엄 대사(智嚴大師)에게서 증법(證法)하고 돌아올 때 서해의 용왕이 인보(印寶)를 받들었으므로 신인종(神印宗)이라고 불렀는데, 우리나라 법문의 비조가 되자 좋은 땅을 골라 이곳에 용연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의 흥망은 옛 문서가 없어져 충분히 고증할 수 없으니 개탄스럽다. 가정(嘉靖) 연간에 해운당 천일사(海雲堂天日師)가 주석하면서 황폐하고 몰락한 것을 걱정하여 선문의 벗들에게 부탁하여 예전 규모대로 다시 창건하였다. 당시에는 전각이 장엄하고 규모가 자못 엄숙하여 강우(江右)[낙동강 오른쪽]에서 최고였는데, 곧바로 만력(萬曆) 연간에 임진왜란을 당해 모두 불타버렸다.
비구승 청하(靑霞)·인잠(印岑)·탄옥(坦玉)·일경(一敬) 등이 발원하여 집을 고치고 지붕을 이어 예전의 모습을 다시 찾아 대웅전 이하 부처를 모신 전각 다섯에 승려의 거처 20여 개로 산문이 흥성했으나 이 또한 한때였다. 숭정 기원 23년 경인년[1650]에 예불하기 위해 점등할 때 불꽃이 닿아 사찰이 사라져버렸다. 비록 흔적은 남아 있다고는 하나 불타지 않으면 재해를 입어버렸으니 이 또한 선문의 한줌 잿더미에 불과하고, 옷가지와 상주할 자본이 모두 연기가 되어버렸다. 대중은 의지할 곳이 없어지자 뿔뿔이 흩어져 사방으로 가고자 하였다. 선백(禪伯) 묵철(默哲)과 조우(照雨) 등이 개탄하며, “이곳은 사찰 중에서 크고도 유명한 곳으로 왕성하다가 무너진 적이 몇 차례나 된다. 전후로 유명한 대사들이 부지런히 경영하여 이런 사찰이 있게 되어 지금까지 모범이 되어 왔는데 우연히 화재를 입었으니 어떻게 차마 버리고 가겠는가?”라고 말하고 각자 서로 모연(募緣)[돈이나 물건을 기부하여 선연을 맺게 함]하기로 맹세하였다. 대중이 기꺼이 취지에 부응하여 부자는 재물을 내놓고 가난한 사람은 힘을 보태 옛 터대로 짓되, 더 확장하여 드넓은 규모와 아름다운 건물이 차례로 다시 완성되었다.
맨 먼저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지어 금불상을 다시 조각해 안치하고 옆에 별실을 끼워 넣은 다음 양무(兩廡)를 이었다. 앞에는 식당, 종각, 사천왕문(四天王門), 조계문(曹溪門) 등이 있고 뒤에는 나한전(羅漢殿)·약사전(藥帥殿)·향적전(香積殿)이 있으며, 남쪽에는 관음전(觀音殿)·명부전(冥府殿)·부도전(浮屠殿)이 있고, 두월료(斗月寮)가 왼쪽에서 받들고 있고 관정료(灌頂寮)와 반상료(返常寮), 함허당(含虛堂)·영류당(永流堂)·명월당(明月堂)이 오른쪽을 둘러싸고 있다.[朝鮮國大丘琵瑟山龍淵寺重修碑 通訓大夫前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校書館校理西學敎授 世子侍講院文學 任守幹撰通 訓 大 夫 前 行 刑 曹 正 郞 南漢明書
達城南一舍有山曰琵瑟亦稱所瑟盖梵音此云苞也羅代笁僧之東遊者賞而名之若毗耶支提之流而今不可攷也地誌云神僧觀機道成居苞山南北兩師有意相邀則山中草木隨之而偃禪林靈蹟之著於茲山者其來尙矣山之東有寺曰龍淵洞有神龍之窟宅故名焉或稱新羅寶壤禪師入中國證法於終南智嚴大師歸時西海龍王奉印寶故稱神印宗爲東方法門之祖診擇勝地剏玆龍淵云而嗣後廢興故籍湮無足徵焉是可嘅也嘉靖間海雲堂天日師住錫而憫其荒落囑附禪侶創新舊制當是時殿宇莊嚴規範敦肅爲江右之最遄及萬曆島夷之變鞠爲煨燼松雲大師惟政命坦玉初剏印岑脩葺復新前觀大雄以下奉佛之殿凡五僧居二十餘區山門興隆亦一時也崇禎紀元之二十三年庚寅禮佛闍梨點燈之際星火所觸寶刹蕩然雖云有跡非火而灾也亦禪門之一刧灰也衣褚常住之資盡爲飛煙大衆無所依庇欲散而之四禪伯默哲照雨等慨然咨嗟曰此寺叢林之大而且著者也或旺或壞凡幾度矣前後名師勤劬經營有此梵宮式至今日偶被欝攸之魔何忍棄而去之相與立誓各自募緣衆皆歡趍富者捐財貧者出力準其故址又增拓之宏規美締次第復完先建寶殿改塑金像而安之夾以別室承以兩廡前有食堂鍾閣天王曹溪等門後有羅漢藥師香積之殿南有觀音冥府之殿浮屠殿斗月寮拱于左灌頂返常之寮含虗永流明月之堂環其右捴]"
이어 좌측 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두 2백 수십 여 개의 기둥이 장중하고 아름다워 환연히 새 모습을 갖추었다. 토목 공사 또한 대단하였다. 절 안에 예전부터 있던 석가모니의 사리가 담긴 탑을 승려들이 바꾸어 새로 만들었는데 예전의 규모보다 장중하였다. 뒤쪽에 벌려 있는 송파(松坡)·발운(發雲)·환적(幻寂)·동운(東雲) 등의 사리탑은 모두 뛰어난 부도이다. 절 앞의 시내에는 돌을 다듬어 용문교(龍門橋)·천태교(天台橋)·무릉교(武陵橋)·방은교(訪隱橋)·홍류교(紅流橋) 등 5개의 다리를 놓았다. 절에 딸린 암자는 4개로서, 명적암(明寂菴)·은적암(隱寂菴)·보제암(普濟菴)·법장암(法藏菴)이 이것이다. 조용히 강경(講經)하는 두 개의 당이 있고 나머지는 선을 수행하는 곳이다.
아, 인도의 종교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온 것이 어느 시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에서 치성하고 고려 말에 극에 달하였다. 근래 우리의 도가 이미 쇠미하게 되자 이단도 따라서 떨치지 못하게 되어 명산의 청정한 지경은 대부분 부역을 피해 머리를 깎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 가운데는 고승으로서 종문(宗門)을 굳게 지키고 탑우(塔宇)를 보수한 사람도 왕왕 있었다. 묵철(默哲), 조우(照雨) 같은 사람들이 도량이 초토가 된 뒤에 힘을 다해 태만하지 않고 실추하지 않아 옛 것을 회복할 수 있었으니 그 뜻은 이처럼 근면하고 그 공은 위대한다고 할 만하다. 고려 말 이래로 유명한 가람과 거대한 사찰이 오래되어 사라진 것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유독 용연사만은 여러 번 불타고[而計之凡二百數十餘楹旣壯且美煥然一新土木之工其亦侈矣寺中舊有世尊舍利所藏之塔緇徒等易以新之特壯于前摸後列松坡友雲幻寂東雲等舍利之塔皆浮屠之所宗者也寺前之溪鍊石而橋者五曰龍門天台武陵訪隱紅流附寺而庵者四曰明寂隱寂普濟法藏是也兩寂講經之堂餘卽安禪之所也噫笁敎自西而東不知在於何代而熾于三國極於麗季及至近世吾道旣微異端隨而不振名山淨界率多逃賦而髠者其中開士之堅守宗門繕修塔宇者往住有之若默哲照雨輩區區用力於道場焦土之後毋怠毋墜能復其舊其志斯已勤矣其功可謂偉矣夫羅麗以來名藍巨刹久而消歇者何可勝計而獨此龍淵屢燬屢]"
다음은 우측 면의 내용이다.
“여러 번 완성되었으니 헤아릴 수 없는 부처의 힘이 멀리까지 다다라서일 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경계가 유난히 신령한 선가의 복지여서 그런 것일까? 아무리 그렇더라도 흥함이 있으면 쇠함도 있는 것이 천도의 필연적 이치이다. 다만 지금 가람이 비록 성하기는 하지만 나중에 혹 폐허가 되어 초목이 무성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혹시라도 이곳에 이어 거처하는 사람이 또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 예전 사람의 공을 없애지 않는다면 저 불법에서 말하는 금계(金界)[절의 별칭]로서 영원한 표식이 될 것이며 옥륜이 항상 구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무리들이 돌에 새겨 공적을 기리고자 하여 천리 길을 걸어와 내게 글을 부탁하였으니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비록 불가의 이론을 배우지 못했으나 대략 그 사실을 서술하여 글을 구한 데 대한 책임을 메웠다. 시주들의 이름은 뒤에 모두 열거하게 하였다[完非特佛力無量所及者遠而抑或境界靈勝爲禪家之福地而然歟雖然有盛有衰天道之所必至也顧今伽藍雖盛後之或墟而爲榛莾者亦不可知也如或繼此而居之者亦能自振不廢前人之功則彼法之所稱金界可以永標玉輪可以常轉其徒方謀勒諸貞石以勗來者千里褁足丐余記文此可謂不負其敎矣余雖不習釋氏之說略叙其事以塞其求檀緣名氏使之具列于後]"
다음은 후면의 내용이다.
"발문 절은 신라 때부터 있었다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맨 처음 실려 있으나 사승(寺乘)[절의 문적]이 없어 알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사명 대사가 와서 폐허가 된 것을 애석해 하여 탄옥(坦玉)에게 창건하게 했으나 규모가 예전만 못하였다. 그러자 다시 인잠(印岑)에게 옛 터를 확장하고 옛 규모를 늘리게 하였다. 경인년에 다시 불에 타 요사채와 전각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종각(鐘閣)과 규궁(虬宮)[법당]만 높다랗게 남았다. 도인 홍묵(弘黙)이 하나하나 복구했으나 이미 오래되어 비가 새고 파손되었다. 승통(僧統) 몽화(蒙和)가 ~마멸~ 절의 글을 받고 동네 사람들을 권유하니 때때로 일유(一庾)[16말]를 주기도 하고 때때로 5수레가 되기도 하였다. 7년 만에 모은 재물이 수천 냥이 되자 백우(白牛)·도올(陶兀)·흑호(黑虎)를 그려 전각을 수리하였다. 법당이 먼저 무너지니 법당을 짓고 그 다음에 종각이 무너지니 종각을 짓고 단청을 칠했다. 별좌(別座)와 대중이 서로 한마음으로 힘을 다해 공사를 마쳤으니 모두의 소중한 공이다.
숭정(崇禎) 기원 후 79년 임인(壬寅)[1772년] 오월 일에 세웠다.[䟦 寺之有自新羅始載於勝覽無寺乘可攷壬辰兵燹松雲適到惜其廢使坦玉草刱其制不及古復令印岑拓舊址增舊制至庚寅又遭囘祿瓊寮鳳閣蕩然無遺鍾閣虬宮巋然獨存道人弘默一一復古剏旣云遠雨漏漫漶降至乙未僧統蒙和念茲在茲粟受於寺衆文勸於里人或與之一庾或收之五乘年才之七貲累近千白牛陶瓦黑虎修殿先墮法堂而搆次墮鍾閣而營景楫之丹雘會彦之別座大衆之成相同心戮力工已 … 崇禎紀元後七十九年壬寅五月日 立]"
2. 사바 교주 석가여래 부도비
전면 전액에 '석가여래 비(釋迦如來碑)'라 써 있다. 이하 내용은 정병삼의 판독과 해석에 따른 것이다. 전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바 교주(娑婆敎主) 석가여래부도(釋迦如來浮圖) 비명과 서.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사헌부 지평(行司憲府持平) 권해(權瑎) 지음. 완산후인(完山後人) 전렴(全濂) 쓰고 아울러 전액을 씀.
옛날 석가여래의 사리(舍利)는 대개 여덟 섬 네 말이라고 한다. 신라 승려 자장(慈藏)[선덕 여왕 때의 고승으로 중국에서 부처의 사리를 들여와 통도사 등에 불사리탑을 세움]이 서쪽으로 천축(天笁)[인도]을 돌아보고 사리 몇 과(顆)를 받들어 동쪽으로 돌아와 양주(梁州)[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通度寺)에 봉안했다고 한다. 모두 두 함에 함마다 각각 2과였다.
만력(萬曆) 임진의 난리[임진왜란]에 왜적이 탑을 훼손하고 사리를 꺼냈는데, 송운 대사(松雲大師) 유정(惟政)이 격문을 들어 화복(禍福)으로써 유도하니 왜적이 두려워하여 완전하게 해놓고 돌아갔다. 송운 대사가 받들어 금강산에 가서 서산 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에게 물으니 휴정이 탄식해 말하기를 '자장은 신인(神人)이다. 그 처음 봉안한 것은 닫혀 있지 않음이 없었는데 끝내는 드러남을 면하지 못하였다. 대개 비장한 것은 나한테 있는데 나한테 있지 않은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다.'하였다. 마침내 한 함은 문인 선화(禪和) 등에게 주어 태백산의 보현사(普賢寺)에 봉안하게 하고 또 한 함은 송운 대사에게 주어 통도사에 돌아가 탑을 개수하여 봉안하게 하였으니 대개 그 근본을 잊지 않은 것이다.
그때 영남에 새롭게 들불이 일어나 모두 새나 쥐들이 쪼고 쓰는 바가 되어 공사를 일으킬 틈이 없었다. 그런데 송운 대사가 일본에 어명을 받아 갈 일이 생겨 이에 원불(願佛)을 받들어 돌아가게 되자 송운 대사는 그 함을 치악산(雉岳山)[강원도 원주에 있는 산] 각림사(覺林寺)에 두도록 했다. 그 제자인 청진(淸振)이 비슬산(毘瑟山)[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있는 산]의 용연사(龍淵寺)에 옮겨 봉안하니 후에 대중들이 서로 의논하여 탑을 만들어 안장하기로 하였다. 또 두 대사의 남긴 뜻에 어그러짐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1과를 받들어 통도사에 돌아가 봉안하고 1과는 남겨 용연사 북쪽 기슭에 봉안하도록 하니 때는 계축년[1673년] 5월 5일에 탑이 이루어졌고 높이가 5자 5치였다.
절의 승려 광헌(廣憲)과 광륜(廣倫) 등이 북으로 7백여 리를 달려와 서울에 이르러 나를 찾아와 일의 처음과 끝을 말하고 비명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공자님의 책을 읽어 불가의 말은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어찌 불가의 사적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석가여래를 묻은 지 1,600여 년이 되었고, 그 사리가 중국을 거쳐 5만 리를 지나 동방에 와서 통도사에 비장된 지 또 940여 년이 되었으며, 왜적이 이미 꺼낸 것을 복원한 지 또 80여 년이 되었습니다. 통도사 옛 탑에 나누어 비장한 것과 비슬산용연사에 이른 것도 그러합니다. 그대의 말을 믿는다면 또한 영이롭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마침내 그 말에 따라 차례로 서술하고 또 명을 지어 이른다. 비슬산은 울창하고 낙동강은 양양한데 /탑이 우뚝 섰으니 석가여래의 사리를 봉안한 것이라. 숭정 기원 후 병진[1676년] 4월 일 세움[娑婆敎主釋迦如來浮圖碑銘幷序 通 訓大夫行司憲府持平權瑎 撰 完山後人全濂 書幷篆
昔釋迦氏之舍利盖八斛四斗云羅僧慈藏西遊天笁奉若干顆而東藏之於梁州之通度寺者凡兩凾凾各二顆萬曆壬辰之難賊毁塔發之松雲大師惟政移檄以禍福怵之賊愳完而歸之松雲奉詣金剛問於西山大師休靜靜歎曰慈藏神人也其始藏之非不閟也卒不免於見發也盖藏之者在我其不在我者無如之何矣遂以其一凾授門人禪和等安於太白之普賢寺又以一凾付松雲還之通度令改塔以安之盖不忘本也時嶺南新中燹衆皆鳥鼠竄未暇興工役而松雲有日域衘命之行仍奉以爲願佛比還而松雲化其凾留在雉岳覺林寺其徒淸振移奉於毘瑟山之龍淵寺後大衆相與謀設塔藏之又愳其有盭乎兩師之遺意奉一顆還安於通度留一顆安于龍淵之北麓歲癸丑五月五日塔成高五尺五寸寺僧廣憲廣倫等北走七百餘里至京都謁余而吿事之始末請銘余曰不佞少讀孔氏書未甞窺佛家語何知其空門事蹟也然釋迦氏圽一千六百餘年其舍利歷中國五萬餘里而之東方藏之於通度又九百四十餘年賊旣發而還之又八十餘年分藏於通度之舊塔曁毘瑟之龍淵自如也信爾言也亦可謂靈異乎哉遂因其說而叙次之又爲之銘曰 毘之山欝欝 洛之水洋洋 有塔兀然 釋迦氏舍利之藏
崇禎紀元後丙辰四月日立]"
3. 석가여래 사리탑 중수비
전면 상부에 '석가여래 중수비(釋迦如來重修碑)'라 써 있다. 전면에 “석가여래 사리탑 중수비 병 명향(釋迦如來舍利塔重修碑並銘享) 화악사문(華岳沙門) 김동전(金東滇) 근지(謹識) 전 궁내부 경리국 주사(前宮內府經理局主事) 황영표(黃永杓) 근서(謹書)”라 되어 있고 비문의 끝부분에 “세존 현화 이구육일년 갑술 십이월 일 수립(世尊玄化二九六一年甲戌十二月 日 竪立)”이라 적고 있다. 1934년의 일이다.
4. 동운 대사 비
전면 전액에 '동운 대사 비(東雲大師碑)'라 써 있다. 전면에는 “유명 조선국 동운 대사 비명 병서(有明朝鮮國東雲大師碑銘幷序) 전성후인진사이익혐찬(全城後人進士李益馦撰) 포산후인진사곽재일전(苞山後人進士郭在一篆) 포산후인유학곽재삼서(苞山後人幼學郭在三書)” 라 쓰고 끝부분에 “숭정 갑신 사월 일립(崇禎甲申四月 日立)”이라 적고 있다. 이 해는 1644년이다.
5. 송파 대사 비
전면 전액에 '송파대(松坡大)', 좌측면 전액에 '사(師)', 후면 전액에 '비명(碑銘)'이라 써 있다. 이후 내용은 김용태의 판독과 김남규의 해석에 따른 것이다. 전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유명(有明) 조선국 송파 대사(松坡大師) 비명(碑銘) : 서문을 병기함
정헌대부(正憲大夫) 형조 판서 겸 홍문관 제학 이은상(李殷相)이 비문을 짓고,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부 판윤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김우형(金宇亨)이 글씨를 썼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 지제교 김만중(金萬重)이 전액(篆額)를 썼다.
을묘년 봄에 나는 병으로 사직하고 동교(東郊)의 병사(丙舍)에서 한가롭게 머물러 있는데 홀연히 벗겨내고 쪼는 소리가 있어서 낮잠을 깨우니 산인(山人)인 광헌(廣憲)과 광륜(廣輪)이 손을 모으고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의 스승인 송파 대사(松坡大師)가 비로소 졸하였으므로 행적(行蹟)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우리 스님이 송월당(松月堂)에게 수업하였으니 송월당은 곧 송운 대사의 의발을 전수한 적파(嫡派)이며 서산 대사(西山大師)의 고제(高弟)인 편정당(鞭精堂)도 우리 스님의 사숙(師叔)이십니다. 합하(閤下)의 왕고(王考) 월사(月沙)께서도 이미 서산 조사(西山祖師)의 명을 지으셨고 백고(伯考) 백주(白洲) 대학사(大學士)께서도 이를 이어 편정당의 명을 지으셨으니 두 비석이 풍악산의 백화(白華)에 마주보고 서 있습니다. 합하께서 만일 또 선사의 비문을 명하신다면 상공의 집안에서 삼대가 우리 공문(空門)에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서산 대사의 문도들도 대를 이어 영광입니다. 합하께서 마지막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서너 달을 머물면서 떠나지 않고 청함이 더욱 간절하여 나는 두 승려가 이 일에 마음을 오로지 쓰는 것이 가상하기도 하고 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와서 명을 청하는 데 옛날 일을 추억하는데 더욱 마음에 감동되는 바가 있었다. 행장을 살펴보건대, 스님은 법명(法名)이 각민(覺敏)이고 송파는 그의 호이다. 속성(俗姓)은 노씨(盧氏)이니 대대로 순천에 살다가 충주로 이주하였다. 어머니 서씨는 달이 품에 들어오는 것을 꿈꾸고 스님을 회임하여서 만력 병신년 3월에 낳았다. 용모가 단아하고 눈썹이 형연(烱然)하여 보는 사람들마다 모두 그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하루는 스님이 여러 아이들을 따라 거리에서 놀고 있는데 충청도 안찰사가 그를 보고 예뻐하여 그를 싣고 함께 돌아가서는 영중(營中)에 놓아 두었다. 그리고 그 뒤에 함께 서울에 가서 수년이 지났다. 노모를 만나 뵙기 위하여 작별 인사를 하고 입에 이르러 방을 보니 현경(懸磬)과 같았다. 나와서 따라 배울 바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농공상이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입산하여 수도하여 세상을 벗어난 사람이 되겠으니 괜찮겠습니까?’라고 하니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것을 허락하였다. 스님은 마침내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 들어가서 송운의 대도제(大徒弟)인 한계 대사(寒溪大師)에게 치발을 청하였다[有明朝鮮國松坡大師碑銘幷序 正憲大夫刑曺判書兼弘文館提學李殷相撰 資憲大夫漢城府判尹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金宇亨書 通政大夫戶曹參議知製敎 金萬重篆
乙卯春余謝病閑居於東郊丙舍忽有剝啄聲▨午眠山人廣憲廣輪拱手立於前以其師松坡大師始卒行蹟告余曰吾師受業於松月堂松月堂卽松雲大師之傳鉢嫡泒而西山之高弟鞭羊堂亦吾師之師叔也閤下王考月沙相召旣銘西山祖師伯考白洲大學士繼銘鞭羊堂二碑對立於楓岳之白華閤下若又銘先師則相公家三世施大惠於吾空門而西山師徒代有榮爲推閤下之終惠焉留數月不去而請益勤余旣嘉二僧之專心於所事不憚千里而來請銘追惟往昔尤有所感愴於心者按狀師法名覺敏松坡其號也俗姓盧氏世居順天移于忠州母徐氏夢月入懷有娠以萬曆丙申三月三日生焉容止端雅眉宇烱然見者皆奇之一日隨羣兒戱於街上忠淸按察使見而愛念載与俱歸留置營中仍與入京者數年爲見老母辭歸至家見室如懸磬出無所從受業乃垂涕而請於母曰人生斯世不爲士農工賈則寧入山而修道爲出世人可乎母泣而許之乃入雉岳山覺林寺祝髮於松雲之大徒弟寒溪大]"
다음은 좌측면의 내용이다.
“또 가야산에 들어가서 치선(緇禪) 등의 책을 받았다. 혹은 소요 대사(逍逕大師)의 문하에서 여름을 보내고 비슬산호구 대사(虎丘大師)에게서 경을 받았다. 또 벽암(碧巖) 호연 대사(浩然大師)에게 질의하였다. 또 임성 대사(任性大師)를 구천동(九千洞)에서 찾아뵙고 7년을 머무르면서 삼고의 깊은 뜻을 탐구하여 여간한 책 이름을 기록해 두고 말하기를 ‘의심을 풀어 세상에 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계미년 봄에 금강산에서 송월당을 알현하고 업을 끝마쳤다. 이 때문에 도가 높아질수록 이름이 더욱 드러나니 원근에서 사람이 폭주하여 배우기를 청하였으나 스님은 모두 허락지 않고 일찍이 사도(師道)로 자처(自處)한 적이 없었다.
스님은 모든 경에 대하여 꿰뚫지 않은 바가 없었으며 더욱이 교종의 삼경에 정통하였다. 한때 스님들이 비록 종장(宗匠)으로 자처하여도 바른 것으로 나아가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부터 10여 년간 혹은 소백(小白)에 이르렀다가 혹은 용문(龍門) 해인(海印) 등의 곳에 갔다가는 정해년 가을에 용슬산(龍瑟山)에 돌아와서 그의 병과 석장을 거두고서 다시는 사찰을 주유하지 않고 드디어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방문을 닫고 입을 막기를 마치 진흙으로 만든 조상처럼 있었다. 매번 묵묵히 생각하여 갑자기 깨닫게 되면[師又入伽倻山受緇禪等書或結夏於逍遙大師之門受經於琵瑟山虎丘大師又質疑於碧巖浩然大師又謁任性大師于九千洞留七年講究三敎奧旨錄成如于卷名曰解疑而傳于世癸未春謁松月堂於金剛山而卒業爲由是道彌高而名益彰遠近輻輳請業而師皆不許未嘗以師道自處師於諸經無不貫闡而尤精於敎之三經一時棒子雖自處以宗匠莫不能正焉自此十餘年間或至小白或至龍門海印等處丁亥秋還龍瑟山斂具拜錫不復周遊寺刹遂結加趺坐掩室杜口如□望人每於默念頓悟]"
이어 후면 내용이다.
“침식을 모두 잊었다. 스님은 늘 문도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각자 심성(心性)이 있으니 나에게 있는 것은 곧 너희들에게 있는 것이니 어찌 자신을 돌이켜 구하지 않느냐?’라고 하였다. 스님은 경술년 11월에 마침내 용연사에서 입적하겠다고 하시고서는 시자(侍者)에게 명하여 붓을 집으라 하고 입으로 불러주어 게송을 하니 ‘사물마다 다른 물이 아니고 머리마다 우리 고향이다. 가련하구나, 남으로 순례 온 그대는 어찌 성을 방문하는가?’라고 하고서는 결가부좌하고 차를 마시고는 관음을 세 번 부르고는 곧바로 돌아가셨다. 스님은 향년 75세였으며 법랍(法臘)으로는 59세였다. 문인(門人)들이 그의 몸을 받들어 절의 서쪽 기슭에서 다비(茶毘)하니 밝은 빛이 밤을 비추는 상서로움이 있었다. 사승(寺僧) 원익(元益)은 백보 쯤에서 목뼈를 얻었고, 광헌(廣憲), 혜원(惠遠) 등은 소백산에 받들어 나아가서 진실로 산새가 울고 골짜기가 응하는 뒤편에서 사리 4과를 얻었다. 그러므로 소백(小白), 태행(太行), 가야(伽倻) 세 산의 스님들이 각각 그 중 1과씩을 청하여 탑을 세워 봉안하였다. 그리고 자진(自珍) 등이 또 그 중 1과를 용연사에 봉안하였다.
스님은 천성이 순수하여 마음을 푹 담가서 도를 닦으니 원근에서 그 풍성을 듣고 멀리서 제자가 되기를 청하는 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럴수록 스님은 더욱 겸손하여 매번 ‘나는 스스로도 다스릴 겨를이 없는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미칠 겨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고 혹은 세시 명절(歲時名節)에 스님의 장수를 장수하는 사람이 있으면 ‘오늘은 며칠이냐?’고 하시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고요함을 지키며 착실함이 절실하여 스스로 자만할 겨를이 없었고 대략이라도 꾸미는 일이 없었으니 참된 대로 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내가 스님의 면목을 본 적은 없지만 스님을 따라 수업을 받은 분들은 가월(枷月), 도요(道遙), 벽암(碧巖) 세 분의 큰 스님이니 그들을 따라서 대하며 깨달았을 것이다. 대개 일찍이 본래부터의 인연이 있었던 데다가 또한 일찍이 스님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으니 스님의 강과 법의 연원을 미루어 알 수 있었다. 드디어 그를 위해 명을 짓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임제종(臨濟宗)의 정파(正泒)를 서산(西山)이 그것을 접하였고/ 운월(雲月)이 잇고 이어 그것이 전하여 스님에 이르렀네/ 스님은 종풍(宗風)을 드러냈으니 날마다 연원이 있도다/ 성을 따라 참된 그대로 잠심하여 강론하시니/ 일찍이 피안(彼岸)에 오르셔서 마침내 깨달음의 길에 뛰어 올랐네/ 길은 운산에 있으니 자취는 진토(塵土)를 작별하였구나/ 선종과 교종을 찾으려 드디어 침식도 잊었도다/ 학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도 스님은 사석(師席)을 양보하였네/ 조사의 달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법의 기둥이 꺾이었구나/ 신이함이 구름을 거두어들이니 일기(一氣)가 멸하지 않네/ 저 용연을 바라보니 이곳이 진정 깨끗한 땅이로다/ 법신(法身)이 보관되어 있는 곳은 백령(百靈)이 호위하는구나/ 큰 비석과 보탑(寶塔)이여 우뚝 상대하고 있으니/ 썩지 않는 스님의 이름이여 천년 뒤에도 전하여 질 것일세.
숭정(崇禎) 병진년[1676년] 4월 일에 세웠다.[處都忘寢食常謂門徒曰汝等各自有心性吾之所存卽汝之所存盍反求之庚戌十一月乃示寂于龍淵寺命侍者執筆口號一偈曰物物非他物頭頭是我鄕可憐南巡子何用訪諸城趺坐啜茶號觀音者三翛然而逝壽七十五法臘五十九門人單奉色身欽之茶毘于寺之西麓有明光照夜之瑞寺僧元益得頂骨於百步許廣憲惠遠等奉詣小白山處誠得舍利四顆於山鳥谷應之後於是小白太行伽倻三山衲子各請其一顆而䢖塔以安之自珍等又奉安其一顆于龍淵寺師天分純粹潛心修道遠近聞風而至負笈請益者累百人而師愈謙抑每曰我不暇自治奚有以及人或於歲時名節人有祈師壽者卽曰今日是何日也聞者皆笑之其守靜着功不自滿暇略無緣餙而任眞者如此余未及見師面目而師之所從受業松月逍遙碧巖三大師則与之從容對晤盖嘗有素而亦曾聞師之名則師之講法之淵源可推而知也遂爲之銘曰 臨濟正派西山接之 雲月承承再傳而師 師闡宗風曰有淵源 循性任眞潛心講論 早陟彼岸乃超覺路 道在雲山迹謝塵土 探賾禪敎遂忘䆮食 學徒雲集師遜 師席 祖月遽晦法棟云折 神殊效雲一氣不滅 瞻彼龍淵寔惟淨界 法身攸藏百靈護衛 豊碑寶塔屹然相對 不杇師名傳之千載 崇禎丙辰四月日立]"
[현황]
비슬산 용연사 중수비와 사바 교주 석가여래 부도비는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며, 비문도 육안으로 판독 가능하다. 석가여래 사리탑 중수비는 비석의 상태는 양호하나 비문에 약간의 마멸이 있어 육안 판독이 어려운 부분도 있다. 동운 대사 비와 송파 대사 비는 비석의 상태는 양호하나 표면에 이끼와 흙 등이 묻어 있어 비문의 육안 판독은 약간 어려운 실정이다.
[의의와 평가]
용연사 비석군은 용연사의 중창과 금강계단의 조성 및 중수, 그리고 용연사와 관련 있는 승려에 대한 내용이 있어 조선 후기 용연사의 역사와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가늠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