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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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城下里 碑石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현풍중앙로 130[성하리 235-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동락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성하리에 있는 조선 후기에서 근대에 건립된 경상도 관찰사와 현풍 현감 등의 공덕비.
[개설]
성하리 비석군(城下里碑石群)은 옛 관아 입구에 있던 35기와 1977년 구마 고속 도로 공사 시 성하동 옛 쌍산 고개 도로변의 2기, 군민체육관 앞 도로 공터에 있던 1기를 현풍 체육관 앞 공터 도로변에 모아 두었던 것을 1997년 현재의 장소에 연도별, 관직별로 분류하여 놓은 것이다. 수철원교 비와 현감 오위주 애민비는 1997년 이후 이전되어 온 것으로 생각된다.
[위치와 현황]
성하리 비석군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현풍중앙로 130에 위치한다. 크게 5군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군은 순찰사와 관찰사 비로 모두 9기이다. 왼쪽부터 수철원교 비명(水鐵院橋碑銘), 1721년 건립 후 1759년 재건립된 현감 오후 위주 애민비(縣監吳侯緯周愛民碑), 1841년 건립된 순상국 서공 휘 희순 영세 불망비(巡相國徐公諱憙淳永世不忘碑), 1841년 건립된 순상국 김공 휘 도희 영세 불망비(巡相國金公諱道喜永世不忘碑), 1881년 건립된 순상국 이공 휘 근필 영세 불망비(巡相國李公諱根弼永世不忘碑), 1884년 건립된 순상국 조공 휘 강하 영세 불망비(巡相國趙公諱康夏永世不忘碑), 1851년 건립된 순상국 서공 기순 애민 선정비(巡相國徐公箕淳愛民善政碑), 1898년 건립된 관찰사 엄공 세영 청덕 불망비(觀察使嚴公世永淸德不忘碑), 1905년 건립된 관찰사 이공 휘 용익 애민 선정 영세 불망비(觀察使李公諱容翊愛民善政永世不忘碑)가 위치하고 있다.
2군은 현감 비로 모두 5기이다. 왼쪽부터 1636년 건립된 김후 인정 비(金侯仁政碑), 1657년 건립된 영장 노□□□□ 거사비(營將盧□□□□去思碑), 1657년 건립된 이후 광진 선정비(李侯光鎭善政碑), 1713년 건립된 홍후 우한 선정비(洪侯禹翰善政碑), 1853년 건립된 성현 찰방 허후 휘 탁 영세 불망비(省峴察訪許侯諱鐸永世不忘碑)가 위치해 있다.
3군은 기타 비로 모두 8기이다. 왼쪽부터 1783년 건립된 행성현 찰방 김종경 선정비(行省峴察訪金宗敬善政碑), 1835년 건립 후 1895년 재건립된 행의금부 도사 이공 선형 적덕 영세 불망비(行義禁府都事李公善炯積德永世不忘碑), 1864년 건립된 본면 서원 고상찬 영세 불망비(本面書員高相璨永世不忘碑), 1903년 건립된 사령 이만수 시혜 불망비(使令李萬樹施惠不忘碑), 1913년 건립된 유학 박도인 시혜 불망비(幼學朴道仁施惠不忘碑), 1854년 건립된 참봉 서공 상민 송덕비(參奉徐公相敏頌德碑), 1918년 건립된 현풍 면장 곽지홍 영세 기념비(玄風面長郭芝洪永世紀念碑), 1908년 건립된 군 주사 곽주곤 선정비(郡主事郭冑坤善政碑)가 위치해 있다.
4군은 군수 비로 모두 5기이다. 왼쪽부터 1898년 건립된 군수 홍후 필주 송덕 영세 불망비(郡守洪侯弼周頌德永世不忘碑), 1900년 군수 홍후 필주 청덕 선정비(郡守洪侯弼周淸德善政碑), 1901년 건립된 군수 이공 병홍 애민 선정비(郡守李公秉弘愛民善政碑), 1905년 건립된 군수 백후 남준 애민 선정비(郡守白侯南埈愛民善政碑), 1930년 건립된 군수 신공 현구 애민 선정비(郡守申公鉉求愛民善政碑)가 위치해 있다.
5군은 현감 비로 모두 13기이다. 왼쪽부터 1647년 건립된 현감 박공 휘 정 선정비(縣監朴公諱渟善政碑), 1682년 건립된 현감 이후 세갑 거사비(縣監李侯世甲去思碑), 1697년 건립된 현감 구후 문유지 선정비(縣監具侯文游之善政碑), 1716년 건립된 현감 홍후 우칭[이] 애민 선정비(縣監洪侯禹偁[儞]愛民善政碑), 1760년 건립된 현감 김후 광태 유애 거사비(縣監金侯光泰遺愛去思碑), 1851년 건립된 현감 심후 교진 애민 선정비(縣監沈侯敎鎭愛民善政碑), 1856년 건립된 현감 김후 두흠 애민 선정비(縣監金侯斗欽愛民善政碑), 1857년 건립된 현감 김후 휘 두흠 청덕 선정비(縣監金侯諱斗欽淸德善政碑), 1863년 건립된 현감 이후 휘 승 청덕 선정비(縣監李侯彙承淸德善政碑), 1874년 건립된 현감 정후 기태 청덕 선정비(縣監鄭侯基泰淸德善政碑), 1881년 건립된 현감 정후 기태 영세 불망비(縣監鄭侯基泰永世不忘碑), 1883년 건립된 현감 민후 종열 청덕 선정비(縣監閔侯種烈淸德善政碑), 1898년 건립된 현감 김후 화식 애민 선정비(縣監金侯華植愛民善政碑)가 위치해 있다.
1열 좌로부터 1군과 2군, 2군의 맞은편에 3군, 3군의 좌측에 4군, 4군의 좌측에 5군이 있다. 비는 몇 기를 제외하고는 형태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이나, 비문은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하여 육안으로 판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형태]
1군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수철원교 비명은 2단의 비좌 위에 규수형(圭首形)의 비신을 올렸다. 비좌는 비를 옮기면서 새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비신 높이 182㎝, 너비 67~62㎝, 두께 35㎝이다.
현감 오후 위주 애민비는 마애비 형태이다. 규모는 현고 125㎝이고, 비신 높이 90㎝, 너비 35㎝이다.
순상국 서공 휘 희순 영세 불망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05㎝, 너비 37㎝, 두께 15㎝이다.
순상국 김공 휘 도희 영세 불망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97㎝, 너비 37㎝, 두께 17㎝이다.
순상국 이공 휘 근필 영세 불망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32㎝, 너비 42~39㎝, 두께 22㎝이다.
순상국 조공 휘 강하 영세 불망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30㎝, 너비 41~35㎝, 두께 18.5~17.5㎝이다.
순상국 서공 기순 애민 선정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40㎝, 너비 55㎝, 두께 25㎝이다.
관찰사 엄공 세영 청덕 불망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33㎝, 너비 43~39㎝, 두께 17.5~15.5㎝이다.
관찰사 이공 휘 용익 애민 선정 영세 불망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38㎝, 너비 43~41.5㎝, 두께 21.5~20.5㎝이다.
2군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김후 인정 비는 비좌와 비신, 하엽형(荷葉形) 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총높이 약 220㎝이고, 비신 높이 136㎝, 너비 78㎝, 두께 21㎝이다.
영장 노□□□□ 거사비는 비좌와 비신, 하엽형(荷葉形) 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총높이 172㎝이고, 비신 높이 118㎝, 너비 50㎝, 두께 14㎝이다.
이후 광진 선정비는 비좌와 비신, 하협형 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총높이 174㎝이고, 비신 높이 115㎝, 너비 61㎝, 두께 20.5㎝이다.
홍후 우한 선정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35㎝, 너비 61~54㎝, 두께 17㎝이다.
성현 찰방 허후 휘 탁 영세 불망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98㎝, 너비 43~38㎝, 두께 18㎝이다.
3군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행성현 찰방 김종경 선정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89㎝, 너비 39.5~35㎝, 두께 16~17㎝이다.
행의금부 도사 이공 선형 적덕 영세 불망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05.5㎝, 너비 47~42㎝, 두께 14.5㎝이다.
본면 서원 고상찬 영세 불망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11㎝, 너비 42.5~40㎝, 두께 21㎝이다.
사령 이만수 시혜 불망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30㎝, 너비 49.5~42.5㎝, 두께 15㎝이다.
유학 박도인 시혜 불망비는 비좌와 비신, 옥개석(屋蓋石)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신 높이 104㎝, 너비 36~28㎝, 두께 14.5~12㎝이다.
참봉 서공 상민 송덕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총높이 172㎝이고, 비신 높이 137㎝, 너비 50㎝, 두께 19㎝이다.
현풍 면장 곽지홍 영세 기념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21㎝, 너비 39㎝, 두께 18㎝이다.
군 주사 곽주곤 선정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21㎝, 너비 44.5~40㎝, 두께 20㎝이다.
4군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군수 홍후 필주 송덕 영세 불망비는 비좌와 원수형(圓首形)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신 높이 124㎝, 너비 39.8~35.5㎝, 두께 13㎝이다.
군수 홍후 필주 청덕 선정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33㎝, 너비 49.5~44㎝, 두께 17.5~14㎝이다.
군수 이공 병홍 애민 선정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24㎝, 너비 36~32.5㎝, 두께 16~14.5㎝이다.
군수 백후 남준 애민 선정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30㎝, 너비 43~41.5㎝, 두께 20~18.5㎝이다.
군수 신공 현구 애민 선정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09㎝, 너비 40.5㎝, 두께 14㎝이다.
5군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현감 박공 휘 정 선정비는 비좌와 비신, 하엽형 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총높이 190㎝이고, 비신 높이 126㎝, 너비 58㎝, 두께 16.5㎝ 이다.
현감 이후 세갑 거사비는 비좌와 비신, 하엽형 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총높이 137㎝이고, 비신 높이 90㎝, 너비 44㎝, 두께 13㎝이다.
현감 구후 문유지 선정비는 비좌와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42㎝, 너비 63㎝, 두께 17㎝이다.
현감 홍후 우칭[이] 애민 선정비는 비좌와 직수형(直首形)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50㎝, 너비 52㎝, 두께 19㎝이다.
현감 김후 광태 유애 거사비는 비좌와 직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45㎝, 너비 43㎝, 두께 24㎝이다.
현감 심후 교진 애민 선정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39㎝, 너비 55~53㎝, 두께 26㎝이다.
현감 김후 두흠 애민 선정비는 비좌와 원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37㎝, 너비 57~53㎝, 두께 20㎝이다.
현감 김후 휘 두흠 청덕 선정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68㎝, 너비 68.5~61.5㎝, 두께 26.5~24㎝이다.
현감 이후 휘승 청덕 선정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23㎝, 너비 55~51㎝, 두께 28㎝이다.
현감 정후 기태 청덕 선정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85㎝, 너비 40㎝, 두께 16㎝이다.
현감 정후 기태 영세 불망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28㎝, 너비 40㎝, 두께 19㎝이다.
현감 민후 종열 청덕 선정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25㎝, 너비 40㎝, 두께 11㎝이다.
현감 김후 화식 애민 선정비는 비좌와 규수형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비신 높이 136㎝, 너비 46~36㎝, 두께 16.5~12.5㎝이다.
[금석문]
1. 1군의 금석문
1) 수철원교 비명
전면에 ‘수철원교 비명(水鐵院橋碑銘)’이라 적혀 있다.
2) 오위주 선정비
전면 중앙에 ‘현감 오후 위주 애민비(縣監吳侯緯周愛民碑)’라 적혀 있고, 전면 우측에 “기묘동□□복수개각(己卯冬□□復竪改刻)”, 전면 좌측에 “신축 이월 일립(辛丑二月日立)”이라 적혀 있다. 오위주는 1720년~1721년에 현풍 현감을 지냈다. 기묘년은 1759년이고, 신축년은 1721년이다.
3) 서희순 선정비
전면 중앙에 ‘순상국 서공 휘 희순 영세 불망비(巡相國徐公諱憙淳永世不忘碑)’라 적혀 있다. 전면 우측에는 “ ……… 어찌 보답하지 않으리오. 여기에 지난 일들을 새기노라[□□□百 曷去其報 報以片石 銘玆緬憶]"이라 적혀 있다. 전면 좌측에는 “ ……… 아가위 나무를 자르지 마라. 사랑을 남겨 두었으니 쉬면서 의지하리라[□及遐□ 勿剪其棠 □深遍輝 留愛憩依]"라 적혀 있다. 후면에는 “도광 이십일년 신축 유월 일□□□립(道光二十一年辛丑六月日□□□立) 도감(都監) 이장춘(李長春) 도장(都長) 이두빈(李斗彬)”이라 적혀 있다. 신축년은 1841년이다. 서희순은 1833년 4월부터 1834년 12월까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4) 김도희 선정비
전면 중앙에 ‘순상국 김공 휘 도희 영세 불망비巡相國金公諱道喜永世不忘碑)’라 적혀 있다. 전면 우측에는 “예전에 늦게 오심을 한탄했더니 이제는 어찌 급히 떠나가시는지? 죽백에다 남긴 이름 쉬이 사라지고 단청으로 그린 화상 오래가지 않네[昔恨暮來 竹帛易涴 今胡遽往 丹靑莫忕]”이라 적혀 있다. 전면 좌측에는 “금전을 출연하여 백성들 소생시킨 공 성대하네. 짧은 비석은 말이 없어도 오히려 청백리 받들고 있으리[出捐錢緡 短珉無語 蘇活靄□ 尙戴淸白]"라는 글이 적혀 있다. 후면에는 “도광 이십일년 신축 유월 일립(道光二十一年辛丑六月日立) 도감(都監) 이두빈(李斗彬) 도장(都長) 이장춘(李長春)”이라 적혀 있다. 신축년은 1841년이다. 김도희는 1839년 2월부터 1840년 7월까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5) 이근필 선정비
전면 중앙에 ‘순상국 이공 휘 근필 영세 불망비(巡相國李公諱根弼永世不忘碑)’라 적혀 있다. 전면 우측에는 “만고의 깨끗한 얼음 같으신 분이 사년동안 다스리니 따뜻한 봄이었네[萬古淸氷 四載陽春]”라는 글이 있고 그 뒤에 “도감 곽진수(都監郭鎭修) 색리 김주철(色吏金柱喆)”이라 적혀 있다. 전면 좌측에는 “한 조각 비석이 보배가 아니라 백성들 입으로 칭송하고 있으니[片石非寶 口碑在民]”이라는 글에 이어 “광서 칠년 신사 오월 일(光緖七年辛巳五月日)”이라 적고 있다. 신사년은 1881년이다. 이근필은 1877년 12월부터 1880년 12월까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6) 조강하 선정비
전면 중앙에 ‘순상국 조공 휘 강하 영세 불망비(巡相國趙公諱康夏永世不忘碑)’라 새겼다. 전면 우측에는 “삼가 우리 공을 생각하니 큰 도량으로 백성들을 인도해 주셨네/ 백성들 감싸듯 아파하듯 높은 덕 밝히시고 인정을 베푸셨네/ 풍속은 태평시절로 올려놓았고 흉년에도 풍족하게 해주셨네/ 범희문처럼 청렴한 뜻 두었고 소소신처럼 공덕을 널리 베푸셨네[恭惟我公 如保如傷 俗躋于泰 澄淸范志 器國牖民 克明克仁 歲荒而豊 宣布召功]”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전면 좌측에는 “당오전의 병폐 막으시어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케 했네/ 영남땅 천리에 만물은 평안하고 백성들 한가롭네/ 퇴임하신 후라도 잊지 않으니 한 조각 빗돌이 빛이 나네[當五錢防 嶺土千里 使百姓安 物平人閒 去後不忘 片石生顔]”이라 적었고 이어 광서 십년 갑신 시월 일립(光緖十年甲申十月日立) 도감(都監) 엄주태(嚴柱泰) 색리(色吏) 송창윤(宋昌允)이라 하였다. 갑신년은 1884년이다. 조강하는 1883년 1월부터 1884년 11월까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7) 서기순 선정비
전면 중앙에 ‘순상국 서공 기순 애민 선정비(巡相國徐公箕淳愛民善政碑)’라 쓰여 있다. 전면 우측에는 “우리 상공의 치적을 입으로 전하고 마음에 새겼네/ 지조가 얼음처럼 깨끗하고 명민한 정사로 공평했네/ 소공(召公)처럼 선정을 베풀었고 범방(范滂)처럼 청렴하게 다스렸네[相公治績 口碑心銘 貞操氷蘗 敏政衡平 召棠巡宣 范車澄淸]”라고 적었다. 전면 좌측에는 “현풍고을 백성들 봄볕에 다시 살아났네/ 해마다 조세를 줄여 주시니 고질병이 사라진 듯 하였네/ 좋고 아름다운 돌에다 백성들의 정성을 새기노라[玄都赤子 陽春化生 連年蠲糴 積痼如惺 煌煌石面 顯刻輿誠]”고 적었다. 후면에는 “함풍 원년 이월 일(咸豐元年二月日)”이라 적었다. 함풍 원년은 1851년이다. 서기순은 1849년 8월부터 1850년 9월까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8) 엄세영 선정비
전면 중앙에 ‘관찰사 엄공 세영 청덕 불망비(觀察使嚴公世永淸德不忘碑)’라 적었다. 전면 우측에는 “청렴 정직하시어 가혹하지 않으니 공평한 정사를 맹서했네/ 어진 정치로 교화를 남기셨고 멀리까지 가난한 사람 우선하였네[廉直不苛 約誓平均 憇棠遺化 遐被先貧]”라 적었다. 전면 좌측에는 “큰 지방 맡아 다스리니 도민에게 경앙을 받네/ 만백성 칭송을 비석에 새기니 사방에서 그 덕을 칭송하리라. 무술년 11월 일[任大方面 憬仰道民 成碑萬口 頌德四鄰 戊戌十一月日]”이라 적었다. 무술년은 1898년이다. 엄세영은 1896년 9월부터 1898년 8월까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9) 이용익 선정비
전면 중앙에 ‘관찰사 이공 휘 용익 애민 선정 영세 불망비(觀察使李公諱容翊愛民善政永世不忘碑)’라 적었다. 전면 우측에는 “슬프구나! 잔혹한 우리 고을, 백성들 고통으로 더욱 한산하네/ 다행히 공의 은덕 두루 미쳐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셨네[哀我殘洞 因瘼尤寒 幸公旬宣 俾民阜安]”라 하고 이어 “감역(監役) 김치규(金致圭) 이영호(李永浩)”라 적었다. 전면 좌측에는 “부결(浮結)을 개혁해 없애주니 모두 다 그 은택을 입었다네/ 이에 한 자 옥돌을 세워서 기쁜 마음 비석에 새겨 칭송하리[革蠲浮結 咸濡澤寬 爰竪尺珉 口碑所歡]”라 적고, “을사 십일월 일(乙巳十一月日) 마름[舍音] 박봉운(朴鳳運)”이라 하였다. 을사년은 1905년이다.
2. 2군의 금석문
1) 김세렴 선정비
전면 상부에 ‘김후 인정비(金侯仁政碑)’라 적었다.
전면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숭정 5년 임신년[1632년]에 공은 집의(執義)로 구설수에 연좌되어 이 고을에 부임하시어 을해년[1635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가셨다. 공의 성은 김이요, 명은 세렴[1593~1646][이다. 자는 도원이며, 동명은 선생의 아호이다. 공은 인품이 온후 순수하시고 지조도 확실하여 명령에 굴복함을 개의치 않으시고 오직 직분을 다함으로써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우리 고을에 부임하신 이래로부터 마음을 보존하여 풍속을 교화하고 뜻을 다해 백성들을 인도하셨다. 향약을 일으키니 백성들의 덕이 두터워지고 학규를 두니 선비들이 따라 바르게 하였다. 조정 신하들이 임금에게까지 소문이 나게 하여 이 사실을 전국에 반포하니 그것이 미치는 바가 또한 넓지 아니한가? 존재(存齋)[곽준] 공의 비를 세워 충효를 드러내고, 『포산지(苞山誌)』를 만들어 인물을 드러내었다. 백성에게 임하면 관대함과 엄함이 같이 있고 일에 임하면 공손하고 맑게 함이 모두 갖추어져 다스림이 공평하고 만물이 조화되었다. 송사가 잘 다스려져 감옥이 비었다.
아! 군수께서 이렇게 한 바가 어찌 그 근본한 바가 없겠는가?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묵묵히 경전을 대하여 경의(敬義) 두 글자를 크게 써서 벽에 붙여두고 고인의 존심 출처의 요점을 삼는 것이 모두 여기에 있었네. 무릇 사물에 처하는 것이 반드시 여기에서 얻은 것이 있은 후에 실행하니 군수의 정치가 마땅히 아름답지 아니한가? 사람을 사랑하고 선비를 좋아하는데 이르러 선한 사람을 포상하고 법을 어기는 사람은 규탄하며, 세금을 거둠에 줄여주니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을 즐겁게 하게 되었다. 고을에 오시어 우리 민들을 입히고 먹게 해 주셨으며 고을을 떠날실 땐 행탁을 텅 비게 하시니 모두 우리 현감님을 논할 처지가 못 되었다. 이에 부로들이 말씀하시기를 예부터 어진 관리로 일컫는 이는 진실로 많으나 각각 하나의 선으로 이름이 났으니, 어찌 우리 현감처럼 학문으로 다스리며 몸으로는 여러 가지 아름다움을 겸한 사람과 같겠는가?
명(銘) 하노라. 옛날의 도를 배워 옛날의 다스림을 행하시니/ 백성 편안하고 풍속 아름다우니 그 덕을 다툴 수 없네/ 또한 사방에 그 은덕을 널리 베푸시니/ 이에 이 돌에 공덕 새겨 길이 흠모하노라.
황명 숭정 구년 병자 정월 일[1636][崇禎五年之壬申公以執義坐言事來守是邦乙亥以病辭歸 公姓金名世濂字道源東溟其號也公德器溫粹操履又確不以命屈爲介懷唯以盡職爲己任自下車以來存心化俗銳意導民興鄕約民德以厚置學規士趨以正筵臣上聞 命頒中外其所及者不亦廣乎立存齋碑旌忠孝也述苞山誌表人物也 臨民則寬嚴竝濟莅事則恭淸備到政平物和訟理而圄空噫侯所以致此者豈其無所本歟晨興盥櫛默對經傳大書 敬義字帖諸壁 以爲古人存心出治之 要都在於是凡有處物 必有得於此而後行之侯之政宜其美矣乎至於愛人好士褒善糾違賦斂就省農桑樂業來則衣食吾民去則囊橐枵然皆未足爲論侯之地矣於是父老曰古稱良吏固多各以一善名 豈若侯以學爲政身兼衆美哉銘曰 學古之道行古政民安俗美德無競 亦及四方厥施普 爰刻斯石以永慕 皇明崇禎九年丙子正月 日]”
2)노□□ 선정비
전면 중앙에 ‘영장 노□□□□ 거사비(營將盧□□□□去思碑)’라 적었다. 전면 우측에 “정유 사월 일(丁酉四月日) ……”이라 적혀 있다. 정유년은 1657년이다. 전면 좌측에는 “……사졸들이 모두 복종하니 옛날에도 드물었고 지금도 드무네[士卒咸服 罕古稀今]”이라 적었다.
3) 이광진 선정비
전면 중앙에 ‘이후 광진 선정비(李侯光鎭善政碑)’라 적혀 있고 전면 좌측에는 “정유 시월 일(丁酉十月日)”이라 적혀 있다. 정유년은 1657년이다. 이광진은 1656년부터 1657년까지 현풍 현감을 지냈다.
4) 홍우한 선정비
전면 중앙에 ‘홍후 우한 선정비(洪侯禹翰善政碑)’라 적혀 있다. 전면 우측에는 “염범(廉范) 같은 분 이리도 늦게 오셨나, 사방 백성들 다투어 하례 드리네/ 구순(寇恂) 같은 분 이리도 바삐 떠나셨나, 한 계절도 어찌할 바 모르겠네[廉來何暮 四民爭賀 寇歸何遽 一季難借]”라 하고, 전면 좌측에는 “돌아가는 수레 만류치 말라, 한 조각 비석 우뚝 서있네/ 백성의 마음 알고자 한다면 이 비석을 한번 보시라[征輈莫挽 片石斯屹 欲知民情 請看玆碣]”이라 하였다. 후면에는 “계사 오월 일(癸巳五月日)”이라 적혀 있다. 계사년은 1713년이다. 홍우한은 1708년부터 1713년까지 현풍 현감을 지냈다.
5) 허택영 선정비
전면 중앙에 ‘성현 찰방 허후 휘 탁 영세 불망비(省峴察訪許侯諱鐸永世不忘碑)’라 적혀 있다. 전면 우측에는 “봉급을 내어 조세를 대신 갚고 관례를 고쳐 은덕을 베푸셨네/ 자신을 미루어 주민의 아픔을 감싸고 하늘의 이치를 얻어 복록을 따랐네[捐俸代斂 革例施德 推己保傷 獲天從祿]”라 하고, 전면 좌측에는 “봄에는 가축을 번식시키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셨네/ 정성스러움에 화려함을 겸하였으니 동짓달의 하늘처럼 푸르고 푸르시네[春蕃魯司 價問涓骨 悃愊兼華 蒼蒼葭月]”이라 적었다. 후면에는 “성상 즉위 오년 계축 구월 일립(聖上卽位五年癸丑九月日立) 지사(知事) 이영운(李英雲) 이동우(李東祐) 도감(都監) 김성린(金聖獜) 도장(都長) 김윤승(金閏昇) 김수권(金守權) 수장(首長) 이동규(李東奎) 이백중(李伯重)”이라 적었다. 계축년은 1853년이다.
3. 3군의 금석문
1) 김종경 선정비
전면 중앙에 ‘행성현 찰방 김종경 선정비(行省峴察訪金宗敬善政碑)’라 적었다. 전면 우측에는 “건륭 사십팔년 계묘 십일월 일립(乾隆四十八年癸卯三月日立)”이라 적고[1783], 이어 “공께서 백성을 다스림에 인의로써 하셨네/ 인의의 이로움은 무엇인가? 정성된 마음 욕심이 없는 것이라네[公之牧民 仁義之足 仁義利何 誠心无慾]”이라 하였다. 전면 좌측에는 “자신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니 공덕을 이에 기술할 만하네/ 인심을 잃지 않았으니 복이 흘러 바다까지 넘치리라[推已及人 功乃可述 不失人心 福流洋溢]”이라 하였다. 후면에는 “도감(都監) 김장복(金長福) 도장(都長) 이성국(李性國) 감색(監色) 이덕룡(李德龍) 원납(願納) 김인갑(金仁甲)” 등을 적어 놓았다.
2) 이선형 선정비
전면 중앙에 ‘행의금부 도사 이공 선형 적덕 영세 불망비(行義禁府都事李公善炯積德永世不忘碑)’라 적었다. 전면 우측에는 “인정으로 덕을 베푸시니 흉년이 들어도 넉넉했네/ 공명하게 서로 이끌고 본심으로 염려해 주셨네[情田飽德 荒年救贍 戴白相率 推赤其念]”이라 적었다. 전면 좌측에는 “쌍산처럼 늙지 않고 낙수같이 길이 흐르리라/ 군자의 덕풍은 비석에 새겨도 가벼우리라[雙山不老 洛水長淸 君子之風 沈碑亦輕]”이라 적었다.
3) 고상찬 선정비
전면 중앙에 ‘본면 서원 고상찬 영세 불망비(本面書員高相璨永世不忘碑)’라 적었다. 전면 우측에는 “두 해 동안 땅을 살피시니 온 고을 백성들 기뻐했네/ 풀의 재앙도 빠뜨리지 않고 환기전 세금을 감해 주셨네[兩秋看坪 全面之喜 無漏草灾 有減還起]”이라 적었다. 전면 좌측에는 “유독 □□뿐만 아니라 실로 자신을 바치셨네/ 이 작은 돌에 새기나니 후세에 길이 전해지리라[非獨□□ 宲是捐己 刊此片石 □傳後禩]”이라 적었다. 후면에는 “동치 삼년 갑자 칠월 일 논공면립(同治三年甲子七月日論工面立) 좌상 유학(座上幼學) 황기형(黃基亨) 도감 유학(都監幼學) 유동록(兪東祿) 위관 유학(委官幼學) 김윤승(金允昇)]”이라 적었다. 갑자년은 1864년이다.
4) 이만수 선정비
전면 중앙에 ‘사령 이만수 시혜 불망비(使令李萬樹施惠不忘碑)’라고 적었다. 전면 우측에는 “돈 사백 냥을 내시어 우리의 고질 세금을 막아 주셨네/ 자신을 해친다고 말하지 말라, 백성들의 이익을 크게 위함이네. 계묘 중추[捐金四百 防我痼貰 莫曰己害 大爲民利 癸卯仲秋]”라 적었다. 계묘년은 1903년이다. 전면 좌측에는 “사람마다 덕을 노래하고 집집마다 칭송하여 전하네/ 한 조각 이 돌은 천추토록 말을 하리라. 묘동면립[口口歌咏 家家頌傳 一片斯石 千秋堪語 竗洞面立]”이라 적었다.
5) 박도인 선정비
전면 중앙에 ‘유학 박도인 시혜 불망비(幼學朴道仁施惠不忘碑)’라 적었다. 전면 우측에는 “□성기□ □□공인 춘경묵조 추수렴균(□性其□ □□公仁 春耕黙助 秋穗廉均) 유가면(瑜伽面) 작인립 도감(作人立都監) 김치래(金致來) 유사(有司) 곽정도(郭正度)”라 적었다. 전면 좌측에는 “유구수농 실□휼빈 명언재자 편석불진 계축 이월 일(攸久穗農 實□恤貧 銘焉在玆 片石不塵 癸丑二月日)”이라 하였다. 계축년은 1913년이다.
6) 서상민 선정비
전면 중앙에 ‘참봉 서공 상민 송덕비(參奉徐公相敏頌德碑)’라 적었다. 전면 우측에는 “넉넉하고 인자하며 타고난 자질 영특하셨네/ 춘궁기에 진휼을 넉넉히 하고 가을 추수엔 세금을 적게 매겼네. 갑인 팔월 일립[有富有仁 天姿英特 賑洽春窮 稅廉秋穡 甲寅八月日立]”라 적었다. 갑인년은 1854년이다. 전면 좌측에는 “이미 풍권을 불사르고 또한 범백을 주었네/ 만백성의 입으로 모두 칭송하니 한 조각 빗돌에 새길 만하네[已燒馮券 且付范麥 萬口咸頌 可語片石]”라 새겼다. 후면에는 “발기(發起) 곽동주(郭東柱) 최봉림(崔鳳林) 이상윤(李相潤) 감역(監役) 최진학(崔振鶴)”이라 새겼다.
7) 곽지홍 선정비
전면 중앙에 ‘현풍 면장 곽지홍 영세 기념비(玄風面長郭芝洪永世紀念碑)’라 새겼다. 전면 우측에 “포산고가 청백기인 보공안민 연기휼빈(苞山古家 淸白其人 輔公安民 捐己恤貧)”이라 새겼다. 전면 좌측에는 “만구송덕 일면동춘 재전정민 영자불린(萬口頌德 一面同春 載鐫貞珉 永玆不磷)”이라 새겼다. 우측면에는 “대정 칠년 구월일 현풍면립(大正七年九月日 玄風面立)”이라 새겼다. 대정 7년은 1918년이다.
8) 곽주곤 선정비
전면 중앙에 ‘군 주사 곽주곤 선정비(郡主事郭冑坤善政碑)’라 새기고, 전면 우측에 “삼재거관 일유신공 재경서리 임민익공(三載居官 一攸伩公 再經署理 臨民益恭)”을, 전면 좌측에 “초거우전 청백유풍 약보기덕 천추불망(草祛郵錢 淸白遺風 若報其德 千秋不忘)”이라 새겼다. 좌측면에는 “융희 이년 유월 일(隆熙二年六月日)”이라 되어 있다. 융희 2년은 1908년이다.
4. 4군의 금석문
1) 홍필주 선정비
전면 중앙에 ‘군수 홍후 필주 송덕 영세 불망비(郡守洪侯弼周頌德永世不忘碑)’라 새겼다. 전면 우측에는 “우와 예처럼 송사하는 일 없었고 즉묵 대부처럼 전야를 개간했네/ 우리 군수 여기에 있으면서 업적을 자랑치 않고 함묵했네[質成虞芮 田卽墨 我侯有此 不伐含 黙]”라 하고, 전면 좌측에는 ”부역을 멈추고 봉급을 털어서 백성들 살찌우고 자신은 야위었네/ 조금이나마 보답코자 하나 예부터 비할 이가 없다네[停賦捐俸 肥民瘦己 涓埃欲報 亘古無比]”라 적었다.
2) 홍필주 선정비
전면 중앙에 ‘군수 홍후 필주 청덕 선정비(郡守洪侯弼周淸德善政碑)’라 적었다. 전면 우측에는 “피폐해진 끝에 우리 군수 부임하시니 추위 가고 봄이 왔네/ 촉군처럼 문치를 이루었고 무성처럼 연가가 울렸네/ 백성들에게 농사를 장려해서 힘을 다해 보와 제방을 만들었네/ 흉년에 궁핍함을 구제해 준 사람 4백명이나 되었네/ 빠진 것 보완하여 더욱 빛냈어도 백성의 비용 쓰지 않았네[廢餘侯莅 寒從春來 蜀郡文治 武城絃歌 勸民稼穡 致力湺堰 迫歲賑窮 四百其人 補闕增彩 莫民費錢]”이라 하였다. 전면 좌측에는 “향교의 성전을 고치는데 박한 녹봉 내어서 도왔네/ 강릉에 불이 나자 관고에서 돈을 냈네/ 재해 입은 전결엔 고루 은혜 베풀었고 백성들 혼례 권장했네/ 마음가짐 청백리라 금을 보길 기와조각 자갈처럼 여겼다네/ 천추에도 사라지지 않도록 한조각 비석이 말해주리[改葺聖殿 捐助薄廩 江陵失火 官廚傾金 灾結均俵 婚嫁勸勉 持心淸白 視金瓦礫 不泯千秋 堪語片石]”라 적었다. 후면에는 “광무 사년 경자 삼월 일(光武四年庚子三月日)”이라 적었다. 경자년은 1900년이다. 홍필주는 1896년 8월부터 1900년 1월까지 현풍 군수를 지냈다.
3) 이병홍 선정비
전면 중앙에 ‘군수 이공 병홍 애민 선정비(郡守李公秉弘愛民善政碑)’라고 적었다. 전면 우측에는 “결폐를 개혁해 따르니 우임금에게 세금낼 때 같이 공평하네/ 칠순 노인까지 고기를 포식하니 한 고을이 함께 풍성하네. 신축 삼월 일 안인동립[結弊從革 禹貢春回 七耆飽肉 一郡共肥 辛丑三月日 安仁洞立]"이라 적었다. 전면 좌측에는 “소식의 제방처럼 여론이 칭송하고 예불 기도한 것처럼 화합되었네/ 온 백성들 입소문 퍼뜨리니 한 조각 비석에 기록할 만하네. [蘇堤輿頌 醴佛祈諧 萬口播聲 片石可語] 감역(監役) 이우택(李祐宅) 이지한(李之汗)”이라 적었다.
4) 백남준 선정비
전면 중앙에 ‘군수 백후 남준 애민 선정비(郡守白侯南埈愛民善政碑)’라 적었다. 전면 우측에는 “군수님 부임이 그다지도 늦으신지, 한결같이 보고 어질게 대하시네/ 병폐를 진단하여 맺힌 것 푸시니 이 고을 동민들이 혜택을 입었네. 을사 십일월 일[侯來何暮 一視同仁 診瘼沿結 惠此洞民 乙巳十一月日]”이라 적었다. 전면 좌측에는 “덕은 새롭고 형벌은 청명하니 풍속이 밝고 순해졌다네/ 백성들로 하여금 잊혀지게 할까봐 돌에 새겨 길이 살펴보게 하리라. [德新刑淸 風凞俗淳 俾也可忘 永觀貞珉] 감역(監役) 김문백(金文伯), 마름(舍音) 이상규(李想奎)”라 적었다.
5) 신현구 선정비
전면 중앙에 ‘군수 신공 현구 애민 선정비(郡守申公鉉求愛民善政碑)’라 적었다. 전면 우측에는 “육재포덕 일경뢰안 흥농장학 구재주빈(六載布德 一境賴安 興農獎學 救災賙貧)”이라 적었고, 전면 좌측에는 “택급초목 화일하천 거후권석 영세불민(澤及草木 化溢河川 去後勸石 永世不泯)”이라 적었다. 후면에는 현풍 번영회가 1930년 10월 세웠다고 기록하였다. 신현구는 1926년 10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달성 군수를 지냈다.
5. 5군의 금석문
1) 박정 선정비
전면 중앙에는 ‘현감 박공 휘 정 선정비(縣監朴公諱渟善政碑)’라고 적혀 있다. 전면 우측에는 “을유 동 도임 정해 춘 사귀(乙酉冬到任丁亥春辭歸)”라 하였고, 전면 좌측에는 순치 사계 정해 삼월 일 사노립(順治四季丁亥三月日寺奴立)”이라 적혀 있다. 정해년은 1647년이다. 박정은 1645년부터 1647년까지 현풍 현감을 지냈다.
2) 이세갑 선정비
전면 중앙에 ‘현감 이후 세갑 거사비(縣監李侯世甲去思碑)’라 적혀 있다.
전면 좌측에 “강희 이십일년 구월 일(康熙二十一年九月日)”, 후면에 “사노비등소건(私奴婢等所建)”이라 적혀 있다. 강희 21년은 1682년이다. 이세갑은 1680년부터 1681년까지 현풍 현감을 지냈다.
3) 구문유 선정비
전면 상부에 ‘현감 구후 문유지 선정비(縣監具侯文游之善政碑)’라 적혀 있다. 구문유는 1692년부터 1697년까지 현풍 현감을 지냈다.
4) 홍우칭 선정비
전면 중앙에 ‘현감 홍후 우칭[이] 애민 선정비(縣監洪侯禹偁[儞]愛民善政碑)’라고 써 있다. 전면 좌측에 “숭정 후 팔십계 병신 사월 일(崇禎後八十季丙申四月日)”이라 적혀 있다. 병신년은 1716년이다. 홍우칭은 1713년부터 1716년까지 현풍 현감을 지냈다.
5) 김광태 선정비
전면 중앙에 ‘현감 김후 광태 유애 거사비(縣監金侯光泰遺愛去思碑)’라 적혀 있다.
전면 우측에는 “부임한 지 4년만에 백폐를 모두 일으켰네/ 쇠잔한 백성 살리고 고통을 없앴으며 덕을 심고 은혜를 남겼다네[莅官四載 俱興百廢 蘇殘祛瘼 種德遺惠]”라 하고, 전면 좌측에 ”외가 아직 익지도 않았는데 삼태기는 왜 갑자기 바꾸는가/ 백성들 우러러 볼 곳 없어 눈물 흘리며 비를 세우네. 경진 4월 일[苽未旣熟 簣胡遽易 民無仰止 和淚題石 庚辰四月日]”이라 적었다. 경진년은 1760년이다. 김광태는 1755년부터 1760년까지 현풍 현감을 지냈다.
6) 심교진 선정비
전면 중앙에 ‘현감 심후 교진 애민 선정비(縣監沈侯敎鎭愛民善政碑)’라 적혀 있다.
전면 우측에는 “우리 현감님은 비석이 아니어도 빗돌은 입으로 칭송하는 것만 못하네/ 청렴 공평을 칭송하고 순박 절약을 노래하네/ 창고를 열어 현풍을 소생케 하고 마음을 미루어 백성들 돌보셨네[莫我侯碑 石不口若 頌淸廉平 歌淳儉約 捐廩蘇玄 推心保赤]”이라 적혀 있다.
전면 좌측에는 “덕의 정치에 근원을 두고 흘러가 배움에 힘쓰게 하셨네/ 공의 부임 몹시 늦으셔도 백성들은 이에 진작되었네/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자 굳은 비석에 새겨두노라[原其德政 流以學力 公何來暮 民乃振作 永圖不朽 貞珉是刻]”이라 적었다. 후면에는 ”함풍 원년 이월 일(咸豐元年二月日)”이라 적혀 있다. 함풍 원년은 1851년을 말한다. 심교진은 1849년부터 1852년까지 현풍 현감을 지냈다.
7) 김두흠 선정비
전면 중앙에 ‘현감 김후 두흠 애민 선정비(縣監金侯斗欽愛民善政碑)’라 적혀 있다. 전면 우측에는 “청렴을 숭상하고 인을 베푸시니 군자의 다스림이라네/ 학교를 수리함에 정성을 다하시고 백성을 구휼하심에 자신의 일처럼 하셨네[尙廉施仁 君子之治修校殫誠 恤民推己]"라 적혀 있다. 전면 좌측에는 “재정에 원망이 없었고 문화는 넉넉함이 있다네/ 현감 부임이 몹시 늦으시더니 현감 퇴임이 너무 빠르셨네[灾政无怨 文化有餘 侯來何暮 侯歸何遽]”라 적었고, 후면에는 ”상지 칠년 십일월 일(上之七年十一月日)”이라 적혀 있다. 상지 칠년은 철종 7년으로 1856년을 가리킨다. 김두흠은 1856년에 현풍 현감을 지냈다.
8) 김두흠 선정비
전면 중앙에 ‘현감 김후 휘 두흠 청덕 선정비(縣監金侯諱斗欽淸德善政碑)’라 적혀 있다. 전면 우측에는 “쌍산이 높고 높음이여 낙수가 깊고 깊도다/ 우리 현감의 덕망과 어지심은 산처럼 깊으시네[雙山高復高 洛水深且深兮 我侯德我侯仁 山如高水如深兮]”라 적혀 있다. 전면 좌측에는 “어찌 감히 그 공덕 낱낱이 열거하리오. 옛날의 두모요 지금의 소부 같으시네/ 산이 넘어지지 않고 물이 마르지 않듯이 우리 현감님 남기신 교화 가득하리라[曷敢臚列枚擧 古杜母今召父兮 山不騫水不渴 我侯遺風藹然兮]”라 적혀 있다. 후면 중앙에는 “함풍 칠년 정사 오월 일 쌍산동립(咸豊七年丁巳五月日雙山洞立)”이라 적혀 있다. 정사년은 1857년이다. 후면 우측에는 “일의 항목은 앞 규정에 의거하였으니 쌍산 백성들은 영구히 손상시키지 말라[一依事目前規雙山□永久勿侵]”이라 적혀 있고, 후면 좌측에는 ”일연봉접제표호번민(一捐俸接濟漂戶蕃民) 도감(都監) 김서린(金瑞獜)”이라 적혀 있다. 김두흠은 1856년에 현풍 현감을 지냈다.
9) 이휘승 선정비
전면 중앙에 ‘현감 이후 휘승 청덕 선정비(縣監李侯彙承淸德善政碑)’라 쓰여 있다. 전면 우측에는 “청렴으로써 자신을 지키고 은혜로써 남에게 미치게 하네/ 다스림이 시행되고 법도가 정해지니 덕화가 행하고 풍속이 어질어 지네. [廉以持己 惠以及人 治成制定 化行俗仁] 도감(都監) 김상태(金相泰) 감관(監官) 이후근(李厚根) 색리(色吏) 임도훈(林道薰)”이라 적혀 있다. 전면 좌측에는 “현감 오시니 황하를 빌려 온 듯하더니 갑자기 가시니 산마저 가벼워졌다네/ 현풍에 세운 한 조각 비석은 이 고을 백성들의 마음이라네. 동치 이년 구월 일[庶擬河借 胡遄山輕 玄都片珉 赤子衷情 同治二年九月日]”이라 적혀 있다. 동치 2년은 1863년이다. 이휘승은 1861년부터 1863년까지 현풍 현감을 지냈다.
10) 정기태 선정비
전면 중앙에 ‘현감 정후 기태 청덕 선정비(縣監鄭侯基泰淸德善政碑)’라고 써 있다. 전면 우측에 “멀리까지 전파된 은덕으로 현풍고을 나날이 새롭네/ 자신을 다해 은혜를 베푸시고 자식 보호하듯 인을 일으키셨네. 갑술 팔월 일 쌍산동립[遠郵之德 玄都日新 推己施惠 保子興仁 甲戌八月日 雙山洞立]”이라 적혀 있다. 갑술년은 1874년이다. 전면 좌측에는 “어찌 광숙(廣叔)의 선정을 흠모하리오? 구군(寇君)의 선정 빌려오길 원하였네/ 폐단을 없애고 병폐를 구제하시니 사람들은 천고토록 칭송하리라. [何暮廉叔 願借寇君 祛弊捄瘼 千古云云] 북동임(北洞任) 박지순(朴志淳) 남동임(南洞任) 이흥범(李興範)”이라 쓰여 있다. 정기태는 1873년부터 1876년까지 현풍 현감을 지냈다.
11) 정기태 선정비
전면 중앙에 ‘현감 정후 기태 영세 불망비(縣監鄭侯基泰永世不忘碑)’라고 적혀 있다. 전면 우측에는 “난새는 탱자나무 숲에 깃들고 꿩은 뽕나무 밑에 알을 까네/ 환정(還政)의 폐단 바로잡고 결정(結政)의 폐단 바로잡았네. 광서 칠년 신사 오월 일[鸞棲枳林 雉雛桑下 矯革還弊 釐正結政 光緖七年辛巳五月 日]”이라 써 있다. 신사년은 1881년이다. 전면 좌측에는 “어지러운 삼나무 가다듬고 아름다운 비단 옷을 지었네/ 유총(劉寵) 같은 훌륭한 태수 보내주셨고 구순(寇恂) 같은 좋은 태수 빌리기 어려운 일. [治其亂麻 製彼美錦 劉守齎送 寇君難借] 도감(都監) 곽진수(郭鎭修) 색리(色吏) 김주철(金柱喆)”이라 적혀 있다. 정기태는 1873년부터 1876년까지 현풍 현감을 지냈다.
12) 민종열 선정비
전면 중앙에 ‘현감 민후 종열 청덕 선정비(縣監閔侯種烈淸德善政碑)’라 쓰여 있다. 전면 우측에는 “방산(龐參)처럼 청렴한 선정 베풀었고 유총(劉寵)처럼 훌륭한 명성 있었다네/ 백성을 사랑함에 간절한 뜻 두었고 선비들에게 자신을 낮추고 예우했네. [龐公薤水 劉君風火 志切愛民 禮優下士] 도감(都監) 곽진수(郭鎭修) 색리(色吏) 김주철(金柱喆)”이라 쓰여 있다. 전면 좌측에는 “송사하는 일 일어나지 않게 했고 은혜를 베푼 일 짝할 이 없었다네/ 한 조각 비석 우뚝이 세워두어 훌륭한 선정 천추에 전해주리. 광서 구년 계미 사월 일[聽訟猶人 施恩寡儔 片石屹立 千秋堪語 光緖九年癸未四月日]”이라 써 있다. 계미년은 1883년이다. 민종열은 1880년부터 1882년까지 현풍 현감을 지냈다.
13) 김화식 선정비
전면 중앙에 ‘현감 김후 화식 애민 선정비(縣監金侯華植愛民善政碑)’라 써 있다. 전면 우측에는 “대니산이 무거움이여 우리 현감님 영혼을 기르셨네/ 현풍 고을 백리를 삼년 동안 다스렸네[尼山重兮 毓靈吾宰 玄都百里 皂盖三載]”라 써 있다. 전면 좌측에는 “포산이 가벼움이여 우리 현감님 성을 버리셨네/ 공덕은 관리와 백성을 생각하고 정사는 청정함을 생각하셨네. 무술 십일월 일[苞山輕兮 我侯棄城 思功吏民 政想淨淸 戊戌十一月 日]”이라 써 있다. 무술년은 1898년이다. 김화식은 1892부터 1894년까지 현풍 현감을 지냈다.
[의의와 평가]
성하리 비석군은 현풍 현감, 현풍 군수, 경상도 관찰사 등이 펼친 행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며, 조선 후기와 일제 강점기의 선정비를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