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6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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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淵寺 |
영어공식명칭 | Yongyeon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용연사길 260[반송리 882]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병선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반송리에 있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의 말사.
[건립 경위 및 변천]
용연사(龍淵寺)에는 현재 두 가지 사적기가 전해 오고 있는데, 하나는 임수간(任守幹)이 지어 1722년(경종 2)에 세운 '용연사 중수비(龍淵寺重修碑)'의 비문이고, 또 하나는 1748년(영조 24)에 금곡 선청(金谷善淸)이 쓴 「용연사 사적(龍淵寺事蹟)」이다. 기록의 형태는 다르지만 모두 용연사의 창건 시기를 신라 시대 관기와 도성, 두 성인 및 보양 선사(寶壤禪師)에서 찾고 있는 점은 같다. 그리고 「용연사 사적」에는 창건 시기를 914년(신덕왕 3)이라고 연대까지 명시하고 있다. 보양 선사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지원하였고, 폐사가 된 작갑사(鵲岬寺)를 다시 일으켜 운문사(雲門寺)를 창건한 사람이다. 보양 선사가 운문사를 창건하기 이전 중국에서 불법을 깨우치고 돌아오는 길에 바다의 용이 용궁에서 대접하고 아들 이목(璃目)에게 모시고 가도록 하였는데, 보양 선사는 이목으로 하여금 가뭄에 비를 내리게 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이처럼 보양 선사는 용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용연사와 연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절 인근에 용주 폭포가 있는데 바로 이처럼 용이 나타났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용연사에 관한 고려 시대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법당 앞의 석탑이 고려 시대의 것이기에 가람이 고려 시대에도 계속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용연사는 1419년(세종 1)에 승려 해운당(海雲堂) 천일(天日)이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왜병들의 방화와 약탈로 잿더미가 되었다. 이를 본 사명 대사가 1603년(선조 36)에 승려 인잠(印岑)·탄옥(坦玉)·경천(敬天) 등에게 명해 절을 재건하도록 하니 대웅전 등 다섯 동의 전각이 들어서고 20여 명의 승려가 살게 되었으며, 1621년(광해군 13)에는 범종각을 건립하였다. 그런데 1650년(효종 1) 어느 날 저녁 예불을 위해 등불을 켤 무렵 별똥이 떨어져 불이 나서 종각만을 남긴 채 절이 온통 타 버렸으며, 이듬해에 승려 일언과 승려 학신이 동상실과 서상실을 건립하였다.
1653년(효종 4)에는 승려 홍묵(弘黙)이 대웅전을, 승려 승안(勝安)이 명부전을 세웠고, 이듬해에는 승려 일주(一珠)가 만월루를 세웠다. 1655년(효종 6)에는 희감(熙鑑)과 홍묵이 함허당(含虛堂)과 관정료(灌頂寮)를 건립하였고, 다음 해에는 청진(淸振)이 관음전을 건립하였다. 1657년(효종 8)에는 계홍(戒弘)이 반상료(返常寮)를, 1658년(효종 9)에는 도행(道行)이 명월당(明月堂)을, 1659년(효종 10)에는 학신이 향로전(香爐殿)을 건립하였고, 1660년(현종 1)에는 일순(一淳)이 약사전을, 1661년(현종 2)에는 계홍이 두월료(斗月寮)를 건립하였다. 1668년(현종 9)에 대종(大鐘)과 금구(金口)를 주성하였으며, 1670년(현종 11)에 천왕문 앞의 석교가 완성되었고, 1672년(현종 13)에는 법고(法鼓)를 완성하였다. 1673년(현종 14)에는 자진(自珍)이 석가여래 부도탑인 금강계단(金剛戒壇)과 비석을 건립하였다. 1674년(현종 15)에는 부도암을, 1675년(숙종 1)에는 사리각(舍利閣)을 건립하였으며, 또 용문교와 법당의 중종(中鐘)을 차례로 완성하였다. 1682년(숙종 8)에 천왕문을, 1688년(숙종 14)에 응진전(應眞殿)과 십육 나한을 조성하였으며, 1693년(숙종 19)에 영류당(咏流堂)을, 1695년(숙종 21)에는 일주문을 건립하였다.
1708년(숙종 34)에 석가여래 부도탑을 중수하였고, 1711년(숙종 37)에 시왕탱(十王幀)을 봉안하고 명부전을 단청하였으며, 1715년(숙종 41)에는 승려 찬화(粲和)가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을 중수하고 단청을 새롭게 하였다. 1722년(경종 2)에 용연사의 내력을 새긴 용연사 중수비를 세웠으며, 찬화에 의해 대웅전과 종각이 중수되었다. 이들 전각은 무려 200여 칸이었으며, 거주하는 승려는 500여 명이나 되었다. 당시 용연사에는 경전 공부를 하는 명적암(明寂庵)과 은적암이 있었고, 참선 공부를 하는 보제암과 법장암이 있었으며, 절 앞의 시내를 따라 용문(龍門)·천태(天台)·무릉(武陵)·방은(訪隱)·홍류(紅流) 등 돌을 다듬어 만든 다리가 다섯 개나 놓였다. 그러나 1726년(영조 2)의 화재로 대웅전 및 동서 별실과 좌우 승당이 소실되었다. 그 뒤 승려 혜조(慧照)가 승려 찬화(粲和)와 힘을 모아 1728년(영조 4)에 가람을 다시 짓고 승려 금곡으로 하여금 새로운 사적기를 쓰게 하였다.
일제 강점기 사찰령에는 용연사가 동화사의 수반 말사(首班末寺)로 되어 있으며, 1934년에 석가여래 사리탑의 중수 불사가 있었고, 사리탑 주위에 석주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전각의 보수와 건립을 통해 수행과 교화의 성소로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현황(조직, 시설 현황 포함)]
용연사는 비슬산 자락에 자리한 절이다. 산내 암자로는 명적암이 있다. 현존하는 전각으로는 극락전, 명부전, 적멸 보궁을 비롯하여 영산전, 삼성각, 안양루[보광루], 천왕문, 일주문[자운문], 사명당, 향로전, 요사, 심검당[종무소], 그리고 최근에 완공하여 설법전으로 이용될 유정당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539호인 달성 용연사 금강계단(達城龍淵寺金剛戒壇)과 보물 제1813호로 지정된 대구 용연사 목조 아미타 여래 삼존 좌상 및 복장 유물,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8호인 용연사 삼층 석탑(龍淵寺三層石塔), 그리고 용연사 부도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