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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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東㠍 |
영어공식명칭 | Choi Dong Jib |
이칭/별칭 | 진중(鎭仲),대암(臺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후기 달성에서 활동한 학자.
[개설]
최동집(崔東㠍)[1586~1661]은 현 대구광역시 동구 옻골 마을 경주 최씨(慶州崔氏) 입향조이다. 이 마을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달성군에 편입된 지역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대구와 현풍, 성주, 영천 지역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진중(鎭仲), 호는 대암(臺巖). 아버지는 현령(縣令) 최계(崔誡)이고, 어머니는 숙부인 순창 설씨(淳昌薛氏)이다. 부인은 이의윤(李宜潤)의 딸 여주 이씨(驪州李氏)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증손녀이다. 아들은 생원 최위남(崔衛南)이다.
[활동 사항]
최동집은 1616년(광해군 8) 병진(丙辰) 증광시(增廣試)에 진사 3등 51위로 합격하였다. 1639년(인조 17)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장릉 참봉(長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이듬해인 1640년(인조 18) 봉림 대군(鳳林大君)[훗날 효종(孝宗)]의 사부가 되었다. 1644년(인조 22) 명나라가 망하자 팔공산(八公山) 부인동(扶仁洞)의 농연(聾淵) 옆에 집[농연 서당]을 짓고 은거하면서 죽을 때까지 출사하지 않았다. 부인동 주민들과 결사(結社)를 맺고 동약을 시행하여 효제충신(孝弟忠信)을 가르치고, 향유들과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연경 서원(硏經書院)을 중건하는 데 앞장섰다.
[학문과 저술]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연경 서원에서 악재(樂齋) 서사원(徐思遠),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에게도 배웠다. 수암(守庵) 정사진(鄭四震), 쌍봉(雙峯) 정극후(鄭克後), 기옹(畸翁) 박공구(朴羾衢) 등과 도의(道義)로써 교유하였다. 시문집으로 『대암 선생 문집(臺巖先生文集)』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1764년(영조 40)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에 최동집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는 유허비(遺虛碑)가 세워졌다. 비문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