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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00018
한자 天主敎
영어공식명칭 Catholicism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집필자 엄진성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교.

[개설]

가톨릭교·공교(公敎)·로마 가톨릭교는 한자 문화권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가톨릭교가 중국에 처음 전래되었을 때 그들의 신앙의 대상인 여호와가 동양에서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하느님과 같다는 것을 역설하자 하느님을 믿는 종교, 곧 하느님의 한자 말인 천주를 믿는 종교라는 뜻으로 천주교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후 한자 문화권에 속한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후기에 중국을 통해 유입된 가톨릭 사상을 천주학이라 하고 그 종교를 천주교라고 호칭하게 되었다.

[한국의 천주교]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엽 베이징[北京]을 왕래하던 조선 사신들이 그곳의 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천주교의 전래는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선교가 아니라, 이른바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라 불리는 그들의 저서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다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이벽(李檗)과 함께 선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비로소 천주교의 신앙 공동체가 구성되게 되었다. 하지만 유학자들은 천주교를 사학(邪學) 또는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조정에 이를 근절할 것을 촉구하였고,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국법으로 엄금하는 한편 위반하는 천도교도들을 사형으로 다스렸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져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 등으로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은 조정의 박해를 피해 벽촌에서 숨어 지내는 등 어려운 신앙생활을 이어 갔다. 천주교가 조정의 박해를 완전히 벗어나게 된 것은 1886년에 체결된 조불 수호 통상 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선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부터였다. 그리하여 1892년 서울 중림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인 약현 성당이 지어졌으며, 선교사의 체류가 허용된 개항지를 시작으로 대도시나 박해 시대에 피신한 신자들의 교우촌을 중심으로 본당(本堂) 조직이 빠르게 결성되었다.

[달성 지역의 천주교]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신자들은 자신이 살던 마을을 떠나 깊은 산골이나 하층민들이 모여 사는 역촌 등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들은 옹기와 숯을 굽고 화전 농사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면서 신앙생활을 전개하였다. 신자들 집에 모여 함께 주일 첨례를 보고 기도를 함으로써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이때 공소집이 생겨났다. 당시 경상도 성주 흠골, 칠곡의 달오, 상주 이안의 배모기에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순조 즉위 초인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세도 정권 초기 권력의 장악 과정에서 이전보다 심한 박해가 전개되어 더욱 많은 신자들이 지방으로 흩어졌다. 이 시기 경상도에서는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일월산중의 봉화 우련전과 영양의 곧은정, 울진과 문경 한실 등에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1815년 을해박해 때에는 이전에 형성된 신자촌인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등에서 체포된 신자 33명이 대구경상 감영으로 이송되어 왔다. 그중 14명은 옥사, 7명이 참수를 당하였다. 1827년 정해박해 때에도 상주, 봉화, 안동 등지에서 체포되어 온 천주교 신자들이 대구의 경상 감영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들은 감옥 안에 갇혀서도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고, 이들에게 교리를 배워 스스로 천주교에 입교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가운데는 대구에서 살던 서용서[김수환 추기경의 외할아버지]도 있었다.

1830년에서 1835년 사이에 달성군 하빈면 낙골에 살던 이재건과 그 가족들은 칠곡 신나무골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대구 민묵골[전 애락원 부근]에 정착하여, 대구 지역 천주 신앙의 뿌리가 되었다. 1836년부터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이 비밀리에 포교 활동을 하는 가운데 대구와 부근 지역의 공소에서 성사를 하였다. 1882년부터 로베르[한국명 김보록] 신부가 강원도 원주의 부흥골에 있으면서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할 때 대구에 와서 판공 성사를 하였다. 당시 대구 지역 신자 수는 197명이었다. 이후 1885년 칠곡 신나무골에 안착한 로베르 신부는 1886년 조불 수호 통상 조약 이후에 여행이 자유로워지자 본격적으로 대구 읍내에서 전교 활동을 하였다.

1888년에는 대구 새방골에서, 1891년에는 대구 읍내의 남산[현 계산 성당]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896년에는 대야벌[현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에 요셉 임시 성당을 건축하였고, 1898년 12월에 한옥의 계산 성당을 완공하였다. 1890년 통계를 보면, 신자 수는 남산이 105명, 새 터가 107명, 동산이 46명 등이다. 이 시기 새방골과 남산에 교리 학교를 세운 것으로 보이며, 성영애회 사업[고아원과 유사한 사업]은 1882년 이후부터 대구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으로 확인된다. 대구의 계산 성당이 완성된 이후에 활발한 전교 활동이 전개되었고, 이 과정에서 달성군에도 다수의 공소와 성당들이 생겨났다.

달성 최초의 공소는 1906년 월배면 상동에서 개소한 조암 공소이다. 신도가 늘어나자 1913년과 1920년에 조암 공소에서 분리하여 서산 공소와 천내 공소가 개소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38년 5월, 모 본당이 남산 본당에서 분가하여 화원 성당이 건립되었다. 달성의 천주교는 꾸준히 교세를 확장하면서 군내 곳곳에 개소한 공소들을 성당으로 건립하였다. 1969년 2월 현풍 성당, 1988년 10월 논공 성당, 1998년 가창 성당, 2002년 1월 서재 성당, 2002년 6월 성산 성당, 2005년 8월 다사 성당, 2007년 9월 유천 성당이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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