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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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達西高等學校 碑石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빈로 118[감문리 81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동락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감문리 달서고등학교 내에 있던 조선 후기 경상도 관찰사와 대구 판관의 선정비.
[개설]
달서고등학교 내에는 경상도 관찰사 황선(黃璿)과 조영복(趙榮福), 대구 판관 김병우(金炳愚)와 송태진(宋泰鎭)의 선정비가 있었으나 현재는 멸실된 상태이다. 황선은 1727년 7월부터 1728년 4월까지, 조영복은 1725년(영조 1) 6월부터 1726년 5월까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고, 김병우는 1860년(철종 11) 3월부터 1862년 8월까지, 송태진은 1868년(고종 5) 6월부터 1869년 12월까지 대구 판관을 지냈다.
[형태]
현재 비가 멸실된 상태이므로 『달성의 금석문』 사진을 기초로 작성하였다. 겸 순찰사 황공 선 영세 불망비(兼巡察使黃公璿永世不忘碑)는 규수형(圭首形) 비신으로, 비신 높이 100㎝, 너비 50㎝, 두께 14㎝이다. 겸 순찰사 조 상국 영복 선정 영세 불망비(兼巡察使趙相國榮福善政永世不忘碑)는 비신과 하엽형(荷葉形) 개석이 한 돌로 되어 있다. 총높이 190㎝, 너비 54㎝, 두께 20㎝이다. 판관 김후 병우 애민 선정비(判官金侯炳愚愛民善政碑)는 원수형(圓首形) 비신으로, 비신 높이 116㎝, 너비 56㎝, 두께 10㎝이다. 판관 송후 태진 영세 불망비(判官宋侯泰鎭永世不忘碑)는 비신과 하엽형(荷葉形) 개석이 한 돌로 되어 있다. 총높이 135㎝, 너비 46㎝, 두께 15㎝이다.
[금석문]
1. 겸 순찰사 황공 선 영세 불망비
전면 중앙에 ‘겸 순찰사 황공 선 영세 불망비(兼巡察使黃公璿永世不忘碑)’라 쓰여 있다. 전면 우측에는 “훌륭하시도다 상공이시여 의리로써 영광을 삼으셨네/ 다스림은 삼양(三養)을 앞세우고 정무에 지극정성 다하셨네/ 어진 바람 부채 따라 불어오고 단비는 수레 따라 내리었네[椅歟相公 理義爲榮 政先三養 務盡至誠 仁風逐扇 膏雨隋車]"라 쓰여 있다. 전면 좌측에는 “우리 백성들 구제하였으니 경상도 지역을 도와 주셨네/ 촉땅 백성이 겨우 살아나고 유땅 슬픔이 없어진 듯하네/ 아! 순찰사님의 덕은 백세토록 생각할 바라네[濟我兆庶 佐慶家邦 蜀氓纔活 柳土纏悲 於焉紀德 百世攸思]"라 쓰여 있다. 끝에는 “무신칠월일하사면진민립(戊申七月日河四面賑民立)”이라 쓰여 있다. 무신년은 1728년이다.
2. 겸 순찰사 조 상국 영복 선정 영세 불망비
전면 상부에 ‘겸 순찰사(兼巡察使)”, 전면 중앙에 ’조 상국 영복 선정 영세 불망비(趙相國榮福善政永世不忘碑)‘, 전면 우측에 “정미윤삼월일하사면립(丁未閏三月日河四面立)”이라 쓰여 있다. 정미년은 1727년이다.
3. 판관 김후 병우 애민 선정비
전면 중앙에 ‘판관 김후 병우 애민 선정비(判官金侯炳愚愛民善政碑)’라 쓰여 있다. 전면 우측에는 “갑자십일월일(甲子十一月日). 삼 년 동안 우리 고을 다스리시니 온 고을이 소생하게 되었다네./세금 줄이시고 폐단 제거하시며 송사 들으시고 세밀히 판결하셨네.[三載爲治 一境賴蘇 蠲糴去瘼 聽訟析毫]"라 적혀 있다. 갑자년은 1864년이다. 전면 좌측에는 “간검김복윤(看撿金復允). 교화는 봄날처럼 고르게 퍼지고 혜택은 썩은 뼈에까지 미치었네/ 여러 사람 칭송은 속이기 어렵고 입으로 전해지는 칭송도 막지 못하리라[化均春脚 澤及朽骨 輿頌難諼 口碑莫遏]"라 쓰여 있다.
4. 판관 송후 태진 영세 불망비
전면 중앙에 ‘판관 송후 태진 영세 불망비(判官宋侯泰鎭永世不忘碑)’라 쓰여 있다. 전면 우측에는 “조세를 감하고 폐단을 제거하시며 학교를 일으키고 풍속을 돈목히 하셨네/ 혜택은 궁핍한 사람 먼저 받게 하고 근본을 다스리고 농사를 장려하셨네. 을사삼월일[蠲祖秬瘼 興學敦風 惠先恤窮 治本明農 乙巳三月日]"이라 쓰여 있다. 을사년은 1869년이다. 전면 좌측에는 “부임하심이 어찌 늦으셨는지 백성들은 소생을 기다렸다네 /빗돌에 새긴 칭송이 만에 하나라도 보답되기 바란다네. 하서면립[來何暮也 傒其蘇矣 貞珉之頌 萬一圖報 河西面立]"이라 적혀 있다.
[현황]
2012년 전까지 비석은 달서고등학교 출입문 좌측 담장 앞에 있었으나, 학교 관계자에 의하면 2012년 담장 앞을 화단으로 조성하면서 비석들을 폐기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달서고등학교 비석군은 현재 멸실된 상태이나 다행히 기록으로 남아 있어 조선 후기 경상도 관찰사와 대구 판관이 펼친 행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